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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시라크대통령 취임/미테랑시대 마침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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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시라크대통령 취임/미테랑시대 마침표

입력
1995.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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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일으켜 탈냉전기집권 “유럽의 거인”/우파견제속 개혁추진 국민애증 한몸에17일 프랑스 대통령의 이취임식을 바라보는 세계인들은 시라크의 첫걸음보다 미테랑의 마지막 발자국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퐁피두대통령의 취임이 드골시대의 종언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테랑의 퇴장도 한 시대의 종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81년 프랑수아 미테랑은 사회주의의 상징인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취임식장에 나타났다. 그로부터 14년뒤 퇴임에 앞서 그는 「할 수 있었던 일은 다했다」는, 이념적 동지 빌리 브란트전서독 총리의 묘비명이 자신의 묘비에도 새겨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냉전의 절정기에 집권한 뒤 탈냉전의 시대에 권좌를 떠나는 미테랑은 국내에서는 군주같은 대통령이었고 국제적으로는 유럽의 거인이었다.

그는 「삶을 바꾸자」는 혁신적인 구호로 집권했지만 86년과 93년 총선에서 잇따라 패배, 우파 총리의 견제를 받는 코아비타시옹(동거정부)속에서 사회주의 노선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던 불운한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2차대전중 독일군에 포로가 된 뒤 탈출에 성공했듯이 우파의 포위속에서도 88년 재집권에 성공, 프랑스 최장수 대통령이 된 불굴의 정치가이기도 했다.

미테랑은 사형제도를 폐지하고 주당 39시간 근무제를 도입했으며 중앙권력을 지방으로 대거 이양하는등 「부드러운」 프랑스 건설에 애썼으며 루브르 박물관 증개축과 바스티유 오페라 창단등 「문화 대국」조경에도 진력했다. 반면, 경제에 있어선 대량 실업사태와 저조한 성장률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서민층 지향의 경제정책을 수정, 현실과 타협하는 「미테랑주의자」였다. 하지만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서 드러났듯이 미국에 맞서 프랑스의 국익과 국민들의 자부심을 지켰으며 헬무트 콜 독일총리와 함께 통합유럽의 초석을 놓은 시대의 개척자임을 누구도 부인 못한다.

개인적으로는 전립선암으로 몇차례 수술을 받고 나치 독일 협력 논란과 혼외정사로 낳은 딸 문제로 상처를 입는등 우울한 황혼을 보내기도 했다.

문학소년으로서 프랑스혁명 시대의 연설문을 탐독하며 훗날 역사의 진로를 바꿔보리라고 마음먹었던 미테랑이 후세에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알 수 없으나 프랑스 좌파를 일으켰고 또 좌파의 퇴조와 함께 물러나는 그가 탈이념과 세대교체를 유산으로 남긴 것은 분명하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애독자일뿐 아니라 그 자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 프랑스를 큰 길로 이끌고자했던 이 노정치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프랑스국민들의 시선에는 애증이 섞여있다.<윤순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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