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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정해직씨의 체험담(5·18특집: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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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정해직씨의 체험담(5·18특집: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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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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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도청총격전 아직도 생생”/“철수” 최후통첩받고 격론끝에 “도청 사수하자”/새벽 계엄군공격에 500여명중 무장 100명만 응사/엄청난 전투력차이 겁에 질려 숨어있다 잡혀『살아남기 위해서는 도청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차마 동료들을 저버리고 달아날 수는 없었습니다』 광주 효덕국민학교 정해직(44)교사는 5·18기간에 가장 긴박하고 처절했던 5월27일의 「도청전투」를 15년이 지난 오늘도 엊그제 일처럼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시 초임발령지인 전남 보성 노동국교 방곡분교에 근무하면서 주말이면 광주의 집에 들르곤하던 정교사는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광경에 분노, 21일 도청의 시위지도부에 합류해 연락책을 맡았다.

『26일 정부측과의 유일한 교섭통로인 총리실 행정전화로 최후통첩이나 다름없는 철수통보를 받고부터 돌연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도청을 지키고 있던 시민들은 협상파와 항쟁파로 나뉘어 격론이 벌어졌으나 곧 항쟁파가 분위기를 장악했다.

「수습대책위원회」에서 시청간부 경찰 관계자등과 공식 창구인 민원실장을 맡고있던 그는 「나가면 살수 있다」는 생명에 대한 애착과 「혼자 목숨을 구할 수 없다」는 대의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결국 동료들과 함께 행동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도청안에는 5백명 정도가 있었으나 이중 1백여명만이 카빈소총과 수류탄등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27일 새벽 2시30분. 도청안에서 갑자기 조명탄이 솟아올라 「도청내에 첩자가 있지 않느냐」는 공포감이 일었다.

그 순간 계엄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곧 옥상과 창문에서 시민군의 응사가 뒤따랐다. 그러나 현역 군인과의 전투는 처음부터가 무모한 것이었다.

분수대 방향의 도청복도 창문에서 응사하던 정교사는 계엄군이 소나기처럼 퍼부어대는 총탄이 빗발처럼 귓가에 날아들어 창문에 얼굴도 내지 못한채 카빈총구만 내밀고 사격을 해댔다.

교육대학 재학중 받았던 군사교육 경험이 떠올라 훈련된 현역군과는 도저히 상대가 안된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바로 옆에서 싸우던 동료가 총상을 입고 고통스레 절규하는 모습을 보고는 억누를 수 없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계엄군의 자동화기 총성이 가까이 접근하자 겁에 질린 시민군 대부분은 응전을 포기하고 도청내 이방 저방으로 숨었다. 그도 새벽 4시께 2층 식산국장(현 농정국장)방에 몸을 숨겼다. 1시간쯤 지나 총소리는 멎었지만 이따금 연사총성에 소름이 끼쳤다. 발견된 시민들을 사살하는 소리였을 것으로 그는 짐작하고 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는 계엄군의 방송을 들었지만 날이 새기 전에 나서면 사살된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상오 5시30분께 계엄군에 발견된 정교사는 손을 뒤로 묶여 피가 흥건한 복도와 계단을 걸어나가 상무대 헌병대로 연행됐다.

사망자 행방불명자 명단등 시민군의 주요 서류를 소지하고 있던 그는 주동자로 분류돼 보안대로 이송됐고, 군사재판에서 내란죄가 적용돼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광주교도소에서 복역하던 그는 81년 4월3일 잔여형기를 면제받아 출감, 83년 광복절에 사면 복권됐다. 그해 9월 광주 무학국교(당시 전남 광산군 소재)에 복직, 3년3개월만에 교단으로 돌아갔다.<광주=송두영 기자>

◎15년지난 지금도 의문점은 여전히…/발생배경·발포명령자·사상자/피해자­가해자측 엇갈린 주장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1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많은 의혹들이 역사의 갈피속에 묻혀 있다. 5·18은 왜 일어났는가, 누가 발포명령을 내렸는가, 사망자와 부상자수는 얼마나 되나, 헬기사격은 있었는가. 「80년 5월 광주」의 진상을 캐려는 작업은 광주청문회등을 통해 꾸준히 계속돼 왔으나 그 의문들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이 시대의 과제로 남아있다.

5·18의 발생배경과 80년 5월 21일 도청앞 집단발포의 명령계통에 대한 의혹은 가해자인 신군부측과 피해자측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부분이며, 현재 진행중인 검찰의 5·18 고소·고발사건 수사의 핵심이다.

5·18 피해자들은 지금까지 『12·12 군사반란으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측의 정권찬탈 음모에 저항권을 행사한 것이 바로 5·18의 본질』이라고 주장해왔다.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로 내각의 기능을 무력화시킨 전두환보안사령관등 신군부 핵심세력이 정권찬탈의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광주시민들의 저항을 과잉진압함으로써 유혈극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5월단체들은 특히 도청앞 발포가 공식적인 지휘명령계통이 아니라 별도의 지휘계통에 의해 자행된 것이라고 강조, 신군부의 정권찬탈 의도를 부각시켜왔다.

즉 육본―2군―전교사―31사단(향토사단)―공수여단등으로 이어지는 명령계통은 형식상의 지휘계통이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공수여단―광주505 보안부대―보안사령부 체계가 보고와 명령지휘계통으로 이용됐다고 보고 있다.

물론 명령계통의 책임자는 신군부 핵심인 정호용 특전사령관―전두환 보안사령관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가해자측은 『계엄군의 고유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우발적인 사건』이라는 일관된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발포는 시위대들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계엄군을 향해 돌진, 계엄군 병사가 깔려 숨지는 사건이 일어나 현지 부대장들의 자의적 판단으로 취해진 자위권 발동이었다는 것이다.

피해규모도 논란의 대상이다. 1,2차 보상결과 현장 사망자가 1백54명, 부상자 사망이 85명으로 사망자는 2백39명이고 행방불명자는 47명으로 집계됐다. 『전해들은 숫자가 8백23명』이라는 아놀드 피터슨목사의 증언이 과장된 소문을 근거로 한 것이라 쳐도 당시 3공수여단 화기담당 하사관이었던 정규형씨의 증언등은 피해자가 더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해준다.

신군부의 광주진압에 미국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미국측은 ▲광주진압군이었던 공수부대는 미군의 작전권 밖에 있었고 ▲20사단 작전권도 한국에 넘어간 상태였다는 점을 들어 5·18진압계획 개입을 부인해왔다.

그러나 공수부대가 배속된 전투교육사령부가 미군의 작전지휘권하에 있었다는 사실등은 『문제 해결을 위해 대화를 촉구했을 뿐』이라는 미국측 설명이 어딘지 궁색하다는 지적을 낳기에 충분하다.

아놀드 피터슨목사의 증언으로 다시 제기된 헬기사격문제도 당시 계엄군의 과잉진압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반드시 규명돼야할 과제이다.<김승일 기자>

◎5·18일지

▲4월14일=전두환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겸임 발표

▲5월10일=최규하대통령 예정에 없던 중동방문

▲5월15일=계속되는 학생시위에 신현확총리 시국담화 발표

▲5월16일=국방부 회의실에서 비상 전군주요지휘관회의. 이자리에서 정호용특전사령관 비상계엄령의 전국 확대실시와 각급 학교의 휴교조치등 제안

▲5월16일=하오10시5분 최대통령 급거귀국. 하오11시 청와대에서 최대통령 주재로 전보안사령관 이희성계엄사령관 주영복국방장관 최광수대통령비서실장등 심야대책회의

▲5월17일=상오9시 각 군별 주요지휘관회의. 상오11시 주국방장관 주재로 제2차 전군주요지휘관회의 열어 비상계엄령 전국확대 실시를 만장일치로 가결. 하오9시30분 중앙청 회의실에서 최대통령 주재로 비상국무회의 열어 비상계엄 전국확대 실시 의결. 하오10시께 김대중 문익환씨등 재야지도자 체포

▲5월18일=새벽2시30분 제7공수특전여단 제33대대 조선대교정 장악후 학생 43명 체포. 상오9시 전남대정문앞에서 학생 2백여명 비상계엄철회 요구시위

▲5월19일=상오10시 전날밤 전남대에 증강투입된 제11공수여단 3개대대 병력 1천여명이 장갑차와 군트럭등에 분승한채 금남로에서 위력시위. 하오 CBS앞 공영터미널앞 금남로등에서 시민 학생등 수만여명 계엄군과 대치

▲5월20일=하오2시께 시민 10만여명 도청앞에 모여 시청앞 공영터미널 광주역 전남대입구등으로 진출, 제3공수여단과 대치

▲5월21일=상오 이계엄사령관 담화문 발표. 시민시위 확산되자 하오4시50분께 계엄군 도청포기후 조선대로 철수. 하오10시11분 광주―목포 국도에서 버스탑승 시민군과 20사단간에 교전

▲5월22일=새벽 20사단 추가투입. 하오3시 통합병원앞에서 시민군과 20사단간 교전

▲5월23일=군진압부대 투입설에 일부학생 재무장

▲5월24일=계엄군 항공기 이용 선무방송 실시

▲5월25일=목포시민들 비상계엄 규탄시위 전개. 전교사 충정작전명령 하달

▲5월27일=새벽1시 3·7·11공수여단 병력이 전남도청 광주공원 전일빌딩에 각각 투입돼 시민군과 교전. 새벽5시10분 진압작전 종료. 상오 국무회의에서 국보위 설치 의결

▲5월28일=전국 주요도시에서 군·경합동 일제 검문검색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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