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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없는 유혈비극”으로 남아(5·18 특집: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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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없는 유혈비극”으로 남아(5·18 특집:Ⅱ)

입력
1995.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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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서 10여년 뒤에야 「민주화 운동」 규정/이젠 역사적 의미와 정당성 재정립해야5·18 광주민주화운동이 15주년을 맞는다. 「광주」와 「5·18」에 대한 평가는 80년 이후 정치 ·사회적 상황에 따라 숱한 고비를 넘으며 변화를 겪어왔다. 「반란」이 「민주화운동」으로, 「폭도」가 「민주화운동의 주역」으로 자리매김되기까지 1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문민정부가 출범한지 2년3개월. 광주와 5·18은 이제 새로운 상황 속에서 다시 그 법적인 정당성과 의미의 재해석을 요구하고 있다.

5·18은 광주 전남지역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로부터 시작됐다.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에 가담했고, 그 시민들을 향해 계엄군은 총을 쏘았다. 발포는 광주시민의 무장을 유발했으며 결국 참혹한 유혈사태로 이어졌다.

5·18이 한국전 이후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되는 까닭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군대가 국민을 향해 총을 쏘았다는데 있다. 공식집계된 사망자가 2백39명, 부상자가 2천6백27명이다. 47명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하다. 전남대 오수성교수는 그 후유증으로 인해 광주는 아직도 집단충격 증세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5·18에 대한 정치·사회적 재평가작업은 그동안 재야운동권과 진보적 학자그룹에 의해 주도됐다. 5공 7년간의 제도권 안에서 5·18을 다루는 일은 금기였고, 6공때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멀게는 동학혁명, 가깝게는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고 6·10항쟁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또 5·18 당시 작전통제권을 둘러싼 미국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며 5·18이 80년대 반미운동의 도화선이 됐다고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다.

5·18을 역사적으로 정립하기위한 작업의 중심역할은 역시 광주시민이 맡고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5·18 관련 심포지엄이 광주에서 개최되고 다양한 문화행사가 80년 그때를 재조명한다. 폭력은 결코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공감이 광주에 이미 뿌리내린지 오래이다.

『5·18은 이제 국민과 민주적 양심의 이름으로 역사의 진실앞에 심문받아야 한다』는 5·18기념재단이사장 조비오신부의 말은 국민적 공감속에 5·18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평가가 내려져야 한다는 광주의 입장을 대변한다.

광주는 분명 변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동안 줄기차게 요구해 온 「진상규명·책임자 처벌」의 대원칙이 바뀐 것은 아니다.

5·18의 연장선 위에 서있다는 문민정부의 5·18 해법은 무엇인가. 결국 가해자 없는 유혈비극으로 남아 역사의 뒤안에 묻히고 마는 것은 아닌가. 문민정부에 기대를 걸었던 광주가 검찰의 5·18 고소·고발사건 수사 추이를 지켜보며 던지는 질문속에는 원칙에 대한 강한 집착이 배어 나온다.

한 광주지역 인사는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는 유태인의 경구는 나치의 유태인 학살전모가 밝혀지고 나치전범이 처벌됨으로써 가능했다』고 전제, 『5·18에 관한 한 아직 그 진실도, 용서해야 할 대상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역설했다. 5·18의 진상이 규명되고 가해 책임자가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그들에 대한 정부의 사면조치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광주의 입장이다.<황상진 기자>

◎5·18이 광주시민에게 남긴 후유증/사망 239명 부상 2,627명… 정신이상 등 피해는 계속/매년 이맘때면 도시전체가 「5월증후군」에 휩싸여

「5·18광주민주화운동―사망자 2백39명, 부상자 2천6백27명, 보상금 수혜대상자 3천4백16명, 보상액 1천8백17억원」―이것이 5·18의 「외형」이다.

그러나 광주시민은 5·18을 아직 결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피해와 후유증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5·18당시 YWCA신용조합에 근무하다 계엄군에 체포됐던 K(47)씨는 81년 석방된뒤 알몸으로 길에 나가는등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1년동안 입원했으나 지금도 그때의 악몽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다. 또 다른 K(37)씨도 계엄군에게 당한 구타 후유증으로 피해망상증세를 앓다가 최근 가족에게 폭력을 휘둘러 정신병원에 격리수용됐다. 심리적 충격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병원을 전전하다 몇년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학생도 있다.

이런 사례들은 극단적인 것이지만 매년 이맘때면 광주는 온몸으로 「5월증후군」을 앓는다. 시민들은 왠지 우울하고 불안한 느낌을 얘기한다. 그 엄청난 주변의 희생 속에서 혼자만 살아있다는 죄책감에 새삼 마음이 무거워진다는 이들도 많다.

심리학자들은 광주시민들의 심리상태가 나치수용소의 유태인들이 겪었던 경험과 유사하다고 진단한다.

광주에서 학생시위가 타지역보다 유달리 빈번한 현상, 정치적 입장을 집단화하는 현상은 심각한 공동피해로 인한 강력한 집단동조의식의 발로로 해석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광주의 「집단동조의식」은 나아가 우리사회에서 광주를 더욱 「고립」시키는 주요변인으로 작용하고 있어 피해는 가중되고 있다.

이같은 견해에 대해 전남대 김동원(사학과)교수는 『5·18은 광주시민에게 물리적 피해 뿐 아니라 정신적 폭력을 휘두른 사건이었다』고 동의하고 광주는 이제 물질적인 보상이 아닌 정신적 치유를 갈망하고 있다고 말했다.<광주=송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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