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언론인협회(IPI)는 지난 43년간 세계의 자유언론을 지켜온 파수꾼이자 감찰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2년 창립된 IPI는 언론자유의 실천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언론을 억압하는 어떠한 정권·정치세력과도 맞서 분연히 투쟁해 왔다. 언론자유가 있는 곳에서만 회의를 갖는 관례를 지닌 IPI총회가 서울에서 열리게 된 것은 한국의 위상과 언론자유가 괄목할만큼 성장했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현재 언론자유가 보장되고 있지 않은 나라가 여러개 있으며 그중에 한국이 포함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58년4월 워싱턴에서 열린 집행위에서 오스트리아언론인 폴라크위원장이 한 말이다. 이 말이 대변하듯 한국은 오랫동안 세계의 자유언론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아왔다. 「언론자유가 없는 나라」 「검열국가」라는 지탄속에 특히 해마다 IPI가 발표하는 「세계언론현황」에 가슴을 조이며 일희일비해 왔던 것이다.
IPI하면 한국일보사 창업주인 고장기영 발행인을 잊을 수가 없다. 일찍부터 한국언론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국제 언론과의 돈독한 교류·협력을 해야한다고 역설한 장발행인은 56년 4차총회때부터 가입을 신청했으나 「언론자유가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하다가 59년 도쿄에서 열린 이사회에서 「언론자유가 있다」고 역설한 끝에 홍종인씨와 함께 개인자격으로 가입했다. 그후 4·19혁명으로 60년12월 이사회에서 한국위원회설치승인을 받고 초대위원장에 취임했었다. 한국언론이 세계적 언론기구와 공식 유대를 맺게 된 계기였다.
그러나 IPI와 한국언론과의 관계는 그 후로도 결코 원만하지는 못했다. 62년12월 한국일보의 「사회노동당」보도 사건으로 장발행인등 4명이 구속됐을 때 IPI는 군사정부에 강력히 항의, 석방케 하는등 한국언론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또 군정, 유신과 5공의 언론규제와 탄압에 대해 신랄한 비판과 항의를 했던 것이다.
따라서 껄끄러웠던 IPI와 한국과의 관계는 6공과 문민정부이후 민주화로 해소되어 총회개최로까지 된것은 엄청난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IPI사상 최대규모로 40개국에서 5백여명의 중진언론인들과 정치인 학자들이 참석, 「한국의 약진」과 「독일통일의 교훈」이란 주제로 세미나를 곁들인 이번 총회는 분단국의 수도에서 열렸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깊다.
이번 총회에 즈음하여 우리 언론은 세계언론으로 비약할 수 있다는 자부심과 함께 우리의 언론현실과 내용을 재점검하고 반성해야 한다. 크게 신장된 언론자유와 언론의 양적인 팽창등 외형적인 성장에만 자족할 것이 아니라 언론자유를 최대한 신장하고 언론내용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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