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1> 1959년 5월14일. 아침부터 방청객으로 가득 찬 대구시의회 회의장 안팎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상오 10시 개회직후 김영조의장은 여당이 낸 조준영(민주당출신)시장 불신임안을 상정했다. 예화1>
당시 대구 시의원은 자유당 16, 민주당 7, 무소속 5명등 28명. 지방자치법은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단체장을 불신임할 수 있게 되어 있어 자유당은 무소속과 민주당의 홍연천의원을 포섭하여 불신임안을 낸 것. 야당은 홍의원이 정식탈당하지 않아 불신임안은 성립될 수 없다며 홍의원을 포위한 채 의원직총사퇴안을 냈으나 의장은 이를 묵살한 후 법에도 없는 경호권을 발동, 야당의원들을 끌어내고 불신임안을 변칙 처리했다.
자유당정권은 58년 소위 24파동으로 보안법을 날치기로 통과시킬때 단체장을 「직선」에서 「임명」으로 바꾼 지방자치법개정안도 포함시켰다. 그후 눈엣가시같은 조시장에게 탈당을 종용했으나 불응하자 7차례나 낸 예산안의 심의를 보이콧했고 법규대로 예산을 집행하자 불법이라고 뒤집어 씌워 축출한 것.
조시장은 이에 맞서 자치법에 따라 경북지사에게 의회해산승인을 요청했으나 얼마전의 전남 송정읍장의 경우처럼 기각함으로써 대구시민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 취임한지 2백25일만에 자리를 강제로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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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의 장기집권야욕으로 관치가 됐던 지방자치는 60년 4·19혁명으로 활짝 꽃피울 수 있었다. 그해 12월 광역·기초의 단체장과 의회의원선거를 4차례에 걸쳐 실시했고 특히 29일 실시한 서울시장선거는 선거사상 처음으로 후보이름을 써넣는 기명투표를 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모처럼 완전한 지방자치시대를 맞았음에도 선거에서부터 운영에 이르기까지 여야의 힘겨루기, 즉 중앙정치가 그대로 전염되어 지방자치를 온갖 부작용으로 얼룩지게 했다. 당시 정치를 장악한 민주당의 신·구파, 민주당과 신민당은 중요한 광역단체장선거에서 치열한 대결에 이어 서울 부산 대구 광주시와 경남·북 전남·북등의 광역의회에서 계속 충돌, 지역발전과 살림등은 제쳐둔 채 의장불신임과 회의보이콧등으로 마찰을 일으켰다.
특히 민주당정부는 야당출신 단체장을 노골적으로 견제했고 이에 맞서 야당의원들은 여당단체장불심임기도에 나서 지방의회등은 정쟁으로 어지러웠다. 결국 5·16세력은 쿠데타로 집권하자 지방자치를 백해무익한 존재로 규정하고 헌법부칙에 「통일후로 실시를 미루기로」 규정하고 말았다.
4대지방선거를 앞두고 지방자치에 대한 중앙정치개입의 당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여당은 지방자치는 주민에 의한, 주민의 자치이기 때문에 중앙정치를 오염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야당은 지방자치는 당연히 중앙정치의 연장으로서 책임있는 정당정치를 통해 참뜻을 구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여당이 중앙정치로부터 차단시키려는 것은 야당이 이번 선거를 김영삼정부의 집권2년반을 심판하는 중간평가로 부각시키려는데 대해 쐐기를 박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물론 지방자치는 자치법정신대로 주민들이 일꾼들을 뽑아 생활향상과 지역발전을 도모해나가는 주민자치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거부터 주민―당원들이 후보와 참일꾼을 고르게 해야 함에도 여야 모두 대선 또는 총선을 치르듯 후보경선서부터 중앙당이 위신과 당력을 걸고 나서는 것도 그렇고 야당의 각파가 후보예선을 장래 세력확보와 연관지어 영향력행사에 열을 올리는 것은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등의 경우 기초단위까지 후보들이 정당을 배경으로 하지만 선거후 정당은 자치에 일절 개입하지 않고 있다. 선거 때도 이들 정당들은 지역별, 권역별 개발공약등을 조정하고 집권후 지방에 더 많은 권한과 예산을 공약하는데 치중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34년만에 부활되는 우리의 전면적인 지방자치가 1950년대의 후진적 모습, 여야당 모두 갖가지 정치적 목적으로 개입하는 혼돈의 모습이 재연되어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야 모두 지방자치에 대한 자세를 재정립해야 한다. 여전히 중앙집권행정체제의 부속기관으로 여기는 것도, 단체장과 의회를 지역패권주의와 정치적 세력확보 기회로 이용하는 자세부터 버려야 할것이다.<논설위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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