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미흡할땐 사회불안 가중/독자외교 강화 미와마찰 예상「라 프랑스 푸르 투스(모든 사람을 위한 프랑스)」를 외친 자크 시라크파리시장이 7일 프랑스 5공화국의 5번째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는 이날밤 파리시청에서의 연설에서 진정한 변혁과 대단결, 새로운 프랑스의 건설을 호소했다.
대권도전 3번째에 엘리제궁에 입성하게 된 집념의 정치인 시라크는 드디어 개인적인 정치야망을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그 어느때보다 어려운 과제들을 안고 있다. 그것은 시라크 당선자의 첫마디처럼 변화에 대한 국민의 드높은 기대와 국민대단결의 절실함이다.
그러나 선거기간에 드러난 프랑스의 사회적 분위기는 희망보다는 좌절과 비관, 그리고 계층간 갈등이었다. 끊임없던 시위와 파업사태는 폭발적인 국민의 변화욕구를 반영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서방선진국중 가장 높은 12%의 실업률 때문이다. 청년 4명중 한명은 일정한 직업이 없다. 실업은 이른바 「상자브리」(무주택자)문제와 소외계층문제를 심각하게 야기했고 사회불안으로 이어졌다. 시라크의 승리는 프랑스의 문제를 좌우의 고전적 이념갈등보다는 경제문제로 인한 계층간 분열로 인식하고 좌우를 모두 포용하는 현실적인 선거운동을 펼친 것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시라크는 실업문제를 퇴치하기 위해 기업의 근로자 사회보장세를 삭감하고 1년이상 실업자 한명 고용에 월 2천프랑을 지원할 것이라고 공약했다. 그는 이와 함께 임금인상, 3천억프랑에 달하는 재정적자축소, 경기부양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같은 공약이 낮은 인플레율과 무역흑자, 강프랑화정책의 희생없이 한꺼번에 이뤄질 수는 없다는 데 시라크의 어려움이 있다. 시라크가 조속한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고 근본적 변혁을 요구하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못할 경우 그는 대규모 시위와 파업의 인질이 될 것이며 68년 5월의 학생 노동자 시위사태와 같은 사회정치불안이 가중될 것이라는 우려가 벌써부터 예견되고 있다.
시라크는 보수우파의 이미지에서 탈피하고 미테랑대통령의 군주적 통치스타일에서 벗어나야 하는 부담도 안고 있다. 그러면서 당내에서 이탈한 발라뒤르총리의 지지세력과 중도우파인 프랑스민주동맹(UDF)을 포용해야 하는 우파대단결도 이뤄야 한다.
시라크의 당선은 대외적으로는 미테랑과 함께 유럽통합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콜독일총리와 미국의 클린턴행정부에도 정치적 부담을 주고 있다. 시라크는 기본적으로 유럽통합을 지지하나 통합방식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이라고 공약, 적극적 유럽통합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또 미테랑이 82년 중단한 핵실험의 재개공약과 함께 드골리즘의 적자로서 강력하고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펼칠 것으로 보여 미국과의 마찰도 심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가 프랑스 정치인중 드문 지한파라는 점에서 한국과의 우호관계는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시라크는 이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대내정치적으로는 서방선진국중 의회의 막강한 지지를 뒷받침받는 가장 강력한 대통령으로서 정국주도권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우파연합은 현재 상하원의 80%를 장악하고 있다.
새로운 지도자를 맞은 프랑스는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시라크가 미테랑 14년집권의 부정적 유산인 실업문제와 정경유착형 부정부패, 사회분열과 계층간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의 개인적 야망만을 달성한데 자족해야 하는 인기없는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파리=한기봉 특파원>파리=한기봉>
◎시라크는 누구인가/3수끝 대권거머쥔 집념파/62년정계입문 장관·총리등 역임/동양문화정통 지한파… 90년방한
프랑스의 21세기를 짊어진 자크 시라크(62)대통령당선자는 두가지 상반된 이미지를 갖고 있다. 독선적이며 변신에 능한 기회주의자라는 폄하된 평가와 따뜻·솔직하며 의리를 중시하는 보스기질에 집념의 정치인이라는 엇갈린 평가다. 이같은 이미지는 그가 30여년간 프랑스 현대정치사의 격랑을 헤쳐오며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기회에 작용했다.
시라크는 62년 드골대통령하의 퐁피두총리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34세에 첫각료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74년 퐁피두대통령이 사망할 때까지 의회문제 농업 경제 내무장관등 4개의 장관직을 역임했다. 시라크는 퐁피두대통령 사망 직후의 대선에서 보수우파인 드골파 후보 샤망 델마스 전총리에게 등을 돌리고 중도우파인 지스카르 데스탱과 손 잡으며 첫 정치적 변신을 했다. 그 대가로 시라크는 지스카르대통령하에서 첫총리(74∼76년)를 지냈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그러나 지스카르대통령과 불화를 겪은 후 총리직을 사임, 76년 드골리즘의 적자임을 내세우면서 현재의 최대정당인 공화국연합(RPR)을 창당해 이번 대선직전까지 당수를 지냈다. 77년 파리시 초대민선시장에 당선된 뒤 현재까지 시장직을 지키고 있다.
그는 화려한 정치경력과 「정치적 동물」이라는 뛰어난 정치 감각에도 불구,대권에는 불운한 정치인이었다. 81년에는 1차투표에서 중도우파의 지스카르와 사회당의 미테랑후보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86년 총선에서는 승리, 88년 미테랑의 재선때까지 두번째로 총리직을 역임했다. 미테랑대통령과의 1차 코아비타시옹(동거정부) 시절이던 88년 대선에서는 결선까지 진출했으나 대권문턱에서 주저앉았다. 93년 총선에서 지스카르의 중도우파(UDF)와 대단결, 상하원의 80%를 장악하면서 그는 최대정당의 당수인 자신에게 돌아올 총리직을 발라뒤르에게 넘겼다. 실업문제등 경제난을 떠맡을 총리직이 대권도전에 결코 유리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지난해 11월 그가 대권출마를 선언할 당시 그의 측근들은 발라뒤르에게 후보를 양보하지 않으면 다시 좌파정권이 이어질 것이라며 출마포기를 권유했다고 한다. 당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사회당의 유력후보였던 자크 들로르 유럽연합(EU) 전 집행위원장의 출마포기와 발라뒤르총리의 스캔들, 그리고 정력적인 선거운동에 힘입어 그는 평생의 야망을 성취했다.
청년시절 공산당 운동을 하기도 했던 시라크는 중부 코레즈지방에서 사업가의 독자로 태어났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화물선에서 일하며 미하버드대 서머스쿨을 졸업하고 프랑스 최대명문인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했다. 58년에 결혼한 부인 베르나데트 여사와의 사이에 딸 둘을 뒀다. 지난 90년 방한한 바 있으며 특히 중국문화등 동양문화에 전문적 식견을 갖고 있는 지한파이다.<파리=한기봉 특파원>파리=한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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