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7일 귀순한 북송 재일동포 오수룡(61)씨는 서울생활 한달만인 4월27일 일본에서 달려온 동생 삼룡(51)씨를 만나 꿈결같은 나날을 함께 보냈다. 젊어서 헤어져 반백의 머리가 되어 만난 형제는 속아살아온 세월을 원통해 하면서도 죽기 전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 꿈만 같았다. 오씨형제를 만나 북송교포들의 고통, 북송가족을 둔 재일동포들의 비애를 들어봤다.<편집자주> ◎“기부금적다”며 가족방문 늦춰 친지 송금하면 세금떼고 전달 편집자주>
―33년동안 어떻게 소식을 주고받았나.
(오삼룡)『북한이 당초 약속을 어기고 일본에 거주하는 가족의 방북을 일절 허용하지 않아 단 한번도 북한에 가보지 못했다. 다만 편지는 가끔 주고받았다. 형님이 아이들 사진을 부쳐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정도다. 형님을 만나기는 틀렸다는 생각이 들어 조카가 국가대표 선수로 성장해 올림픽에 참가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도했었다』
―맏아들을 북한에 보내고 소식을 몰랐던 부모님 심경은 더했을텐데.
(오삼룡)『어머니(김인수·88년 83세로 작고)는 83년 천신만고 끝에 북한을 한번 방문했다. 형님의 북송이 추진된 것은 가족 모두가 조선국적이었고 조총련의 과장선전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가족방문을 학수고대하는 일본 친지들의 염원을 외면하다 20년전 한국정부가 조총련계 동포의 고국방문을 받아들이자 이에 자극받아 가족방문을 허용했다. 그러나 조총련 활동에 적극 공헌한 사람이나 기부금을 많이 낸 사람들에게만 선별적으로 방북을 허용, 많은 동포들의 원성을 샀다.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어머니는 기부금이 적다는 이유로 방북이 계속 지연되자 몹시 화가 나 국적을 한국으로 바꿨다. 당황한 조총련은 그 직후 어머니에게 방북을 주선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형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어머니는 「네 형집에도 못가보고 손녀도 못봤다」며 크게 낙심했다』
(오수룡)『어머니의 방북기간은 열흘이었으나 우리 모자가 실제 만난 기간은 닷새에 불과했다. 어머니는 당시 내가 살던 신의주 집에 와보고 싶어했으나 북한당국은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 모자는 북한당국이 주선해준 원산의 선전용 여관에서 닷새동안 함께 지냈다. 어머니는 「아들 집에도 못가게 하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며 몹시 화를 냈다』
―송환노력은 해보지 않았나.
(오삼룡)『형님을 일본으로 데려올 방법이 있었다면 모든 노력을 다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선전과 외화벌이 목적으로 재일동포를 북송시킨 북한이 북송자를 되돌려 보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형님의 북송을 평생 후회하던 어머니가 북한으로 이주하겠다고 나선 적이 있다. 그러나 한번 들어가면 일본에 남는 자식들과 또 다시 생이별해야 하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북한행을 포기했다. 북한에 있는 형님을 생각하며 매일 피눈물을 흘린 어머니의 사연을 영화로 만든다면 온세상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것이다』
―북송동포들이 일본의 가족에게 송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는데.
(오삼룡)『형님이 보내온 편지의 대부분이 생활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엔화송금을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도 「네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못하겠지만 힘 닿는데까지 도와주라」고 입버릇처럼 당부했다. 감기약 영양제등 의약품과 의류도 인편과 소포등을 이용해 여러차례 보냈다. 북한에는 등기나 은행을 통해 돈과 생필품을 보내도 도착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북한에 들어가는 북송동포편을 자주 이용했다』
(오수룡)『북한에는 비누 수건 치약등 생필품과 의약품이 턱없이 부족하다. 대다수 북송 재일동포가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일본의 친지들에게 송금을 부탁한다. 조국방문단편에 돈을 보내오거나 은행을 통해 송금하면 세금을 떼고 전달한다』<고재학 기자>고재학>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