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은 평양이다.1993년 8월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평양에서 살았다. 평양토박이인 셈이다. 1980년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입대하여 건축학공부와 군사정치교육도 받았다. 1988년도 군관으로 임명되어 5년간 통신소대장과 경비소대장으로 근무했다.
인민무력부 총정치국 영화문학창작실에 등록되어 영화제작에도 참가해 보았다. 내가 근무한 부대는 조선인민군 제583군부대(군사건설국)이다.
서울이나 미국이 모르게 중요한 전략군사기지들을 건설하고 시설하는 곳이다. 대량살육무기저장고로부터 미사일기지와 비행장 잠수함기지에 이르기까지를 두더지처럼 땅속에 건설한다.
북한은 평양 한개를 더 세울 수 있는 막대한 재부를 땅속에 묻어놓고 있다. 언젠가 평양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배우의 집에 놀러간 적이 있다. 북한에서 영화배우라면 사회적으로나 신분적으로 높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데 15살난 배우의 아들이 어깨가 으쓱해서 들어왔다. 무슨 좋은 일이 있나 했더니 백화점에서 치약 3개를 산 것이 큰 자랑이었다. 한사람에게 1개씩만 파는 것을 두번은 줄을 서서 샀고 한번은 영화배우의 아들이라고 어느 분이 끼워주어 샀다고 했다.
『참 잘했구나. 글쎄 치약이 떨어진지 한주일이 넘었다니까』
유명배우의 개탄인지 아들에 대한 칭찬인지 아리송한 말이었다.
대외경제위원회 당책임비서의 집 사정 역시 별 차이가 없다. 대외경제위원회라면 아프리카와 동남아 나라들에 공장을 건설해주는 정부기관이다. 승용차도 고급벤츠를 탄다.
그집에서는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으레 평양창광 음식거리 식사표를 내준다. 음식거리에는 하루나 이틀전에 발급된 음식배정표가 없으면 주변에 어술렁거리기도 힘들다. 그집에서 따끈한 밥한끼를 해주지 못하는 것은 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요란한 간부의 집에서 쌀걱정을 하다니.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국가에서 주는 배급쌀은 직위에 관계없이 공정하다. 아들 딸은 독일과 소련에 유학가 있으니 두사람의 한달 배급이라야 30㎏정도다. 전시절약미와 애국미등의 명목으로 이것저것 떼면 더 줄어든다. 당책임비서는 하루에 7백이고 부인은 3백이다. 남한과는 식생활 방식이 달라서 이북사람들은 큰밥사발에 가득 먹어야 속이 후련해 한다.
어느 손님이 한끼라도 먹고 간다거나 눈치둔한 친척이 하루라도 묵어가면 큰일이다. 한달에 쌀 10㎏정도를 야매(암시장) 가격으로 사야만 살아갈 수 있다.
북한사람들은 큰 것을 바라지 않는다. 옥수수밥이라도 편안히 먹고 신발이나 비누, 치약같은 필수품만이라도 제대로 사서 쓸 수 있는 사회를 그린다. 북한사람들이 서울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는 불보듯이 뻔하다. 평양에서 살았다는 나도 퀭하여 몸둘바를 모르는데 북한의 지방사람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약력
▲64년 평양출생 ▲대동강공업대학 건축학과 졸업 ▲조선인민군 군사건설국 소위 임관 ▲93년 중위때 혜산을 거쳐 연변으로 귀순 ▲연세대 경제학과 1년 재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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