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뉴욕지사 이승환기자 방북기/쪽빛 해금강서 본 지척의 남통일전망대 감회/이동매대원 물건팔기 안간힘… 개방바람 느껴금강산의 아름다움과 섬세한 자태는 듣던대로 빼어났다. 필설로 옮길 수 없을 정도의 절경이었다. 금강산여행에서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산과 바다가 아직 오염되지 않았다는 점이다(암벽 곳곳에 시뻘건 글씨로 새겨 놓은 김일성 부자에 대한 충성구호를 빼고는). 금강산 골짜기를 흐르는 물은 자갈을 훤히 드러내며 투명했고 해금강의 바닷물은 짙은 남색을 띠고 있었다. 금강산에 3일 머물렀다. 특히 지난달 24일 해금강을 관광하면서 휴전선을 넘어 대진의 통일전망대를 보았던 때의 감회는 잊을 수가 없다. 지난 93년 통일전망대를 관광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는 망원경을 통해 선녀봉과 그 앞의 해금강쪽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거꾸로 해금강에서 통일전망대를 육안으로 본 것이다. 안내원은 해금강에서 8백만 가면 분사분계선이라고 귀띔했다. 이처럼 가까운 거리를 눈앞에 두고 서로가 대치하고 있다는 분단의 아픔은 새삼 가슴을 저미게 했다.
금강산은 원산과 통천을 거쳐 자동차로 갔다. 차창 밖에 보이는 농촌의 풍경은 정겨웠다. 모내기 준비가 한창이었고 곧 주저앉을 것만 같은 경운기가 힘겹게 흙을 뒤엎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도로변 주택의 마당에도 채소와 곡식으로 보이는 작물들이 심겨져 있었다. 소년들은 지나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 댔고 길가의 사람들은 호기심어린 눈길로 일행을 바라보았다.
금강산 등반에 나선 23일은 운이 좋게도 날씨가 화창했다. 잘 닦여진 등산로를 따라 우선 비봉폭포로 갔다. 골짜기 굽이굽이에는 맑은 물이 넘쳐 흘렀고 고개를 들면 1만2천여 봉우리가 일행을 반겼다. 집선봉을 거쳐 상팔담을 지나 비룡폭포에 다다르니 점심때가 됐다. 쏟아지는 물소리가 너무 우렁차 귀가 멍멍했고 물속에 30초 이상 손을 담글 수 없을 만큼 물이 찼다.
안내원은 가는 곳마다 금강산 굽이굽이에 얽힌 전설을 말해주었다. 이동매대 의례원들이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일행중에 89년에 금강산을 다녀온 분이 있었는데 그분의 얘기로는 그때는 이동매대가 없었고 물건을 사라는 권유도 없었다고 했다. 북한에도 서서히 개방의 바람이 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룡폭포 앞에서 만난 이동매대 의례원은 일행이 전날에 마주친 적이 있는 여자였다. 그런데 물건값이 어제보다 비싸 그 이유를 물었더니 『여기까지 가져오느라 힘들었으니 당연히 그값을 받아야지요』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기자와 재미한인산악회일행은 평양에서부터 사정을 한 끝에 금강산에서 23일밤을 야영했다. 특별히 허가받은 야영이어서 야영지가 아닌 등산로에 겨우 텐트를 칠 수 있었다. 사방이 조용하고 흐르는 물소리가 유난히 잘 들렸던 별밤을 쉽게 잊지 못할 것같다.
비로봉이 마주보이는 전망대에 올라 금강산 봉우리 봉우리를 다시한번 본 뒤 암벽에 설치해 놓은 철제사다리를 이용해 하산했다. 24일 밤에는 숙소인 금강산호텔에서 2백여 떨어진 금강온천에서 목욕을 했다. 라돈천이라는 이 온천은 2∼3명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10개의 욕실이 있었다. 목욕요금은 6원(우리돈 2천3백원정도).
금강산에서 해금강까지는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인 시골길로 1시간여 걸렸다. 해금강으로 가는 곳곳에는 가난에 찌든 북한의 농촌과 어촌이 있었다. 해금강에 도착하자 안내원은 이곳이 군작전지역임을 상기시킨 뒤 행동을 조심하고 특히 사진촬영을 조심해 줄 것을 당부했다. 해안선을 따라 철책선이 쳐져 있었고 곳곳에 모래를 파 만든 참호가 있었다. 어떤 곳은 참호에 전기시설까지 돼 있었다.
일행은 일반인의 통행이 제한된 해변으로 안내되었다. 전복 해삼 문어 성게등 싱싱한 해산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복과 해삼을 내장만 뺀 뒤 그자리에서 바닷물에 씻어 실컷 먹었다. 맛있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