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것」강화하되 공공성 잊지말아야/빈 틈에 넘치는 창조적 가능성을 모색한다개혁의 시대다. 개혁하지 않으면 새 시대를 열고 나갈 수가 없다. 개혁에는 물론 미래의 청사진과 목표가 있어야 하지만 과거의 잔재청산에도 철저해야 한다. 일제시대이래 제도화되고 구조화되어온 부정부패는 말할 것도 없고 여러 가지 형태의 좋지 않은 관행들도 애써 혁파해야 한다. 지금은 분명 물건너간 감이 있지만 정부도 그동안 이런 점에 애 많이 쓴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물 건너갔다고 정부를 비난하기 이전에 개혁이, 그것도 민주화개혁이 오직 권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실 민주화개혁에서 더 중요한 주체는 정부보다 시민이다. 그것도 시민의 의식, 민주시민의식이다. 민주시민의식이란 무엇일까? 우선 개인인권의 존엄성에 대한 철저한 존중과 공공적 사회의식의 생활화를 들 수 있다.
이 말은 언뜻 매우 진부한 공자왈 맹자왈로 들릴지 모르겠다. 초등 중등교육 교과서에 누누이 되풀이되는 이야기니까. 그러나 기실 민주주의사회에서 이것처럼 소중한 것은 없다. 이 두가지 의식이 시민속에 깊이 뿌리내리는 것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제도나 권력, 행정의 비리나 나쁜 관행을 비판하고 나아가 그것을 고치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 참된 개혁이요 민주주의의 일상적 생활화인 것이다. 바로 이 소중한 민주시민의식이 우리 사회엔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고 생활화하지 못하고 있다. 이 점이 결국 개혁을 둔화시키고 형해화하여 부패회귀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자신을 되돌아보라
지금 그러면 주체인 시민이 우선적으로 할 일은 무엇일까? 잠시라도 짬을 내어 자기자신을 되돌아보는 일이다. 나는 과연 자신과 이웃의 존엄한 개인적 인권을 존중하였는가? 나는 과연 공공적 사회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생활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였는가? 한번 심각하게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참된 민주화개혁의 첫 출발점이다.
우선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잘 알려져 있듯이 나는 4·19혁명이후 오랫동안 이른바 민주화운동을 해온 사람이다. 그런데 민주화를 위해 온갖 신산고초를 겪기까지 한 사람이 막상 사회의식은 강하되 개인의 인권에 대한 관념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소스라쳐 놀란 일이 있다.
젊은 철학자 김진석교수는 잡지 「그물코」를 2년여동안 나와 함께 준비해온 동인이다. 생명운동이나 환경운동, 그리고 철학등에 관해 수없이 의견교환을 해왔으며 많은 점에서 견해의 일치를 보기도 했다. 작년 여름엔가 종교인평화회의에서 「환경운동의 사상적 기초」에 관한 세미나 발제를 부탁받은 적이 있다. 나는 마침 함께 있던 김진석교수에게 그 철학적 기초문제를 몇개 항으로 요약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그렇게 했다. 나는 거기에 내 자신의 마지막 항목을 덧붙여 발제를 했고 환경운동의 철학적 전개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틈」이라는 나의 책에도 게재했으며 지난 2월4일 한일심포지엄때에는 「동북아생명공동체와 새 문화의 창조」라는 제목의 내 발제문 뒷부분에 삽입하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발제문에 그의 철학개념인 「포월」과 「소내」를 그의 개념임을 밝히지 않은채 나의 지문 가운데 사용했다. 이것이 말썽이 되었다. 김진석교수는 극도로 마음이 상해 이러저러한 우여곡절끝에 결국 내 곁을 떠나버렸다. 그는 빈틈없는 사람이다. 엄청난 손실이다. 나는 깊은 상실감과 함께 커다란 당황감에 휩싸여 버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하긴 그 발제문의 일본쪽 번역본 주석부분에 「포월」과 「소내」가 나의 철학개념이라고 번역자가 주를 붙인 것이 치명적이었으리라.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얼굴이 타는 듯한 참괴감속에서 며칠밤 잠을 못 이루며 그 원인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물론 「포월」이나 「소내」를 나의 창조물로 둔갑시킬 의사는 아니었다. 「포월」은 이미 출판된 그의 저서의 제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내」는 나의 「틈」사상과 유종원의 「소지욕기통」명제, 그리고 소산지기론에 대한 나의 견해로부터 촉발되어 그가 결국 생각해낸 개념이다. 나에게 네것 내것의 분별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환경운동의 사상적 기초」의 그 몇개 항목들의 내용은 이미 나도 비슷하게 생각한 것들이었고 익숙한 것들이었다. 종보다 개체를 강조한 것은 사회생태학의 머레이 북친이 이미 오래전에 제기한 것이고 과학기술을 폐기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문제라는 항목은 거의 상식적인 이야기이며 기계에도 생명이 있다는 주장은 해월 최시형(해월)선생의 경물사상과 이반 일리치의 「공환성」,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에코 에티카」속에 나타나며 또한 「생명의 미술로」라는 나의 미술논문 가운데서 내가 오래전에 밝힌 바 있다. 「기우뚱한 균형」이라는 말은 김진석교수가 만든 개념으로 내가 아주 즐겨 쓰는 멋진 말인데 기실 그 이전에 나는 「비평형적 평형」이라는 개념으로 같은 뜻을 표현했고 주역의 「시중」도 또한 비슷한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그의 노작이요 그의 지적 소유권에 속한다. 그의 이름을 명백히 밝혔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내게는 그것이 그의 개인적 인권과 관계된다는 관념이 없었고 전혀 일어나지도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나와 동인, 운동권문자로는 「동지」였기 때문이다. 동지!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민주화운동과정에서는 동지간에 사실 네것 내것이 별 구분이 없었고 사상은 공유라고 생각했으며 글은 서로 위험이나 역할에 따라 나의 글을 너의 이름으로, 너의 글을 나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것은 나의 습관이 되어 버렸다. 뿌리가, 나의 오늘의 이 큰 상실감과 당황감의 뿌리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내것·네것없이 활동
조용히 앉아 이 글을 쓰노라니 옛 기억들이 잇달아 떠오른다. 1964년 5월20일 민족적 민주주의장례식 조사는 내가 쓴 것을 송철원씨가 발표했다. 1965년 한·일조약 체결을 비판하는 봄의 선언문은 내가 쓰고 지금 한살림회장인 박재일씨가 책임지고 투옥되었다. 1968년 내가 입원중에 구성한 동학혁명영화 시나리오 「태인전투」는 고인이 된 벗 하길종감독의 「새야 새야 파랑새야」로 정착되었다. 나의 이름이 위험했기 때문이다. 1969년 겨울 70년대와 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이론적 기폭제였던 「현실동인선언」은 내가 쓰고 고 오윤의 이름으로 인쇄발표되었다. 1970년 당시 「오적(오적)」의 앞부분 삽화는 고 오윤이 그리고 내가 사인했다. 1971년 가을 한국종교계의 현실참여의 기폭제였던 천주교원주교구 부정부패규탄선언문은 내가 쓰고 당시 기획실장 김영주선생이 책임졌다. 1972년 천주교문화운동 순회연극대본인 「금관의 예수」는 지금 외교관인 이동진씨가 가져온 초고를 내가 대폭 뜯어고쳐 내 이름으로 상연되었다. 이 작품을 두고 이동진씨는 그뒤 여러 차례 자기 작품임을 주장했으나 나는 도무지 그런 문제엔 흥미가 없어했던 기억이 난다. 1973년 천주교원주교구 농촌개발운동 선전연극인 「진오귀」는 내가 썼으나 공연되지 못하고 이후 제일교회에서 임진택씨 이름밑에 「청산별곡」으로 개명하여 상연되었다. 1974년 「소리굿 아구」는 내가 쓰고 김민기씨 이름으로 상연되었다. 1974년 민청학련당시 「민중의 소리」라는 장시는 장기표씨가 썼으나 내가 뒤집어 썼다. 이미 여러해 전에 동아일보 지상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그 유명한 나의 「양심선언」은 감옥밖에 있던 고 조영래변호사가 쓴 것이다. 후배 장선우감독의 영화 「성공시대」는 3시간여에 걸친 나의 구술녹음이 원작이다.
나는 민족문화운동을 하는 여러 후배들에게 틈만 나면 민족예술전통의 재해석에 입각한 수많은 미학명제를 얘기해줬고 그들은 그것을 자기 이론작업의 뼈대로 삼았다. 1970년대 초반과 1980년대 초반 나는 천주교원주교구 기획실과 사회개발위원회에서 일하면서 지학순주교님의 강연 강론원고등과 위원회의 주요 도큐먼트들을 썼다. 거기에 내 이름은 없었으며 나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오히려 기쁘게 생각했었다.
내가 오래도록 모신 원주의 고장일순선생이 마지막으로 생각난다. 20대에 몽양의 제자로서 오래도록 간디를 숭배했던 선생에게 70년대 내내 민주화운동의 주요 기지였던 원주운동의 방향을 생명운동으로 전환할 것과 그 테제, 그리고 이 운동의 사상적 기초로서 수운·해월선생의 동학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을 진언한 것은 1980년 겨울 내가 출옥한 직후의 일이다. 진언은 받아들여졌고 원주는 생명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내가 스승으로 모신 분에게 진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 분이 그것을 받아들여 민중의 생활개혁을 통한 문명전환운동의 제일보를 내디딘 것은 그저 기쁜 일일 뿐이었다.
그런데 선생이 돌아가신뒤 이런 일이 있었다. 몇몇 제자들과 사람들이 말하길 선생은 일생을 내내 수운·해월선생의 사상을 따라 사셨으며 생명사상과 생명운동, 그 테제들을 창안하여 새 방향을 가르치셨다고. 그래 그러면 어떠랴. 동학이나 생명이나 네것이냐 내것이냐 아무나 열심히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동지요 스승이 아닌가. 내 생각은 그랬다. 그러나 그 다음 김아무개가 동학과 생명사상을 선생에게 배우고서도 마치 제가 시작한 것처럼 배은망덕한 짓을 한다는 말들에는 조금 기분이 상했다. 왜냐하면 6년여의 긴긴 감옥생활에서 내가 피투성이로 몸부림치고 오뇌하며 얻은 결론이 동학이요 생명사상이며 그뒤 그로 인해 또 긴긴 세월을 과거의 동지들과 숱한 젊은이들과 심지어 해외의 벗들 교포들에게까지 견딜 수 없는 비난과 냉대와 멸시와 비웃음을 받았던 고통의 세월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 이제야 알겠다. 그리고 이해하겠다. 김진석교수의 상심을. 그가 그 나름으로 열심히 사색하고 힘들여 구성한 개인적 노작이 사회적 용도, 공동체적 사상공유, 또는 동인의 이름으로 쉽사리 그 지적 소유권이 훼손당하는 것에 견딜 수 없어 하는 마음을.
○쓴사람에 모든책임
나는 최근 탁월한 개인주의와 우주사회를 제 속에 모신 개인의 독특한 개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그럼에도 막상 개인의 존엄한 인권인 지적 소유권의 중요성에는 눈뜨지 못한 것이다. 나는 아직 민주시민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이제야 그의 상심을 통해 글은 혼자 쓰는 것이며 쓴 사람이 책임지고 그 권리와 영예도 또한 그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날카롭게 깨닫는다. 지금도 갑이 쓰고 을이 발표하는 사례는 시민운동단체에서도 흔한 관행이다. 과거 민주화운동의 잔재다. 이것은 고쳐져야 한다. 반드시 자기 글은 자기가 써야 한다는 것을 지천명을 넘어 이순에 다가가는 이 나이에야 깨닫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허나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는 것이 또한 사람이니 어쩌랴. 2월 심포지엄이후 나는 서둘러 그 원고가 실리는 「대화」지와 일본의 「세카이(세계)」지에 연락, 김진석의 개념임을 밝히도록 조처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사유는 정당하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사유엔 공공성이 포함되어 있다. 사유가 강조·강화될 때 그 공공성도 더 커진다. 틈이 커지는 것이다. 사유는 그 공공성을 발휘할 때 드디어 단순한 이기적 욕망을 넘어서 그 정당성을 입증받는다. 더욱이 철학, 더욱이 사람과 자연을 살리려는 생명의 철학일 때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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