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뉴욕지사 이승환 기자 방문기/통일향한 뜨거운 염원인듯/개마고원 설해 장엄한 해돋이/천지서 하루 자겠다하자 안내인 “정신있냐”/향도역 여안내원들과 양주·북한술로 술판백두산 최고봉인 장군봉에 올라 감격에 젖어 있을새도 없이 하산을 재촉해야 했다. 이내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고 돌개바람은 갈수록 거세졌다. 장군봉에서 천지쪽으로 내려가 하루를 야영하겠다고 했더니 안내원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결국 향도역 시멘트바닥에서 침낭을 이용해 새우잠을 청했다. 잠이 올리가 없었다. 이튿날인 27일 새벽5시에 장군봉쪽으로 걸어가 개마고원의 설해를, 치솟아 오르는 일출을 보았다. 하얀바다를 뚫고 올라오는 붉은해는 어제 보았던 낙조와는 또다른 장엄이었다.
일출을 보고 향도역으로 와 몸을 녹이고 매대(판매대)에서 산 일본라면으로 아침을 때운 뒤 다시한번 장군봉에 올랐다.
장군봉 재등반을 마치고 향도역으로 돌아와 이 곳에 상주하는 의례원(여자안내원)들이 끓여준 얼거지국(일종의 나물국)과 쌀밥으로 점심을 먹은 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하산길에 나섰다.
백두역까지 걸어와 스노모빌을 타고 백두밀영으로 왔고 또다시 어제탄 소형버스를 타고 삼지연 비행장으로 갔다. 비행장에는 일행이 타고온 구소련제 쌍발비행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오 4시께 이륙한 비행기는 평양 순안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는 함흥에서 동해안으로 빠져 남하한 뒤 다시 내륙으로 들어가 1시간20여분의 비행 끝에 평양에 도착했다.
향도역에서 보낸 백두산의 밤은 영원히 잊지못할 추억이다. 단층 목조 슬래브형으로 지은 향도역에는 40여평쯤 되는 시멘트바닥이 있었다. 그리고 이 바닥에서 3계단 올라가면 매대가 있고 여기에는 대형 전기난로등 간단한 취사시설이 마련돼 있었다.
향도역에는 모두 5명의 의례원(여자안내원)이 있었다. 모두 예뻤고 비로도 한복을 입고 있었다. 이곳에 상주한다고 해서 숙소를 좀 보자고 했더니 한사코 사양했다. 매대에는 프랑스산 고급코냑과 중국에서 수입한 중국제 코카콜라와 스퍼트음료가 있었고, 일제라면과 일제과자등이 정결하게 정돈돼 있었다. 북한산 들쭉술과 신덕샘물등도 있었다. 백두산에서 양주와 코카콜라를 보니 착잡한 생각을 감출수 없었다.
안내원은 향도역의 고도가 해발 2천7백12라고 했다. 향도역과 백두역, 그리고 두곳을 잇는 삭도시설등은 모두 범민족대회가 있었던 89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의례원들이 우리가 준비해간 쌀로 지은 저녁을 먹고 나서 이내 술판이 시작 됐다. 우리가 가져간 조니워커 위스키 두병을 먼저 주고 받았다. 양이 찰리가 없었다. 매대에 있는 들쭉술의 뚜껑이 속속 열렸다. 아침에 확인해보니 무려 21병을 마셔서 없앴다. 의례원들도 분위기에 휩쓸려서 인지 권하는 잔을 거절하지 않았다. 흥이 오르자 의례원들은 가라오케까지 꺼내왔다. 북한의 인기가수 리경숙이 범민족대회 때 불렀다는 인기가요 「반갑습니다」가 되풀이 됐다.
술판은 새벽까지 계속 되었는데도 의례원들과 안내원들은 결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하산길에 나섰을 때 벌써 일주일을 같이 다녀 친숙해진 해외동포 영접총국소속인 안내원이 정색을 하며 잠시 보자고 했다. 3시간여가 걸리는 하산길을 둘이서 먼저 가자고 했다.
평양 도착첫날인 4월20일 뉴욕지사를 경유, 한국일보에 송고한 평양발 기사때문이다. 4월21일자 한국일보 1면에 평양거리의 스케치가 실렸었다. 안내원은 대뜸 『이선생 섭섭합네다. 왜 진작 기자선생이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습네까?』라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평양에서 한국일보에 기사가 나자 기사가 실리게된 경위와 기자가 입국한 과정을 추적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이번 평양축전에 한국기자들은 모두 비자발급이 거부됐다. 베이징까지 간 일부기자들은 서울로 되돌아 와야 했다.
안내원은 백두밀영에 도착해 일행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백지를 주더니 인적사항과 입국경위및 기사송고과정등을 자세히 써달라고 했다. 그런뒤에는 북한당국은 나의 기사송고를 더이상 문제삼지 않았다. 평양축전개막식인 28일 또다시 팩스로 뉴욕을 통해 서울로 기사를 보냈다. 이 기사는 29일자 한국일보시내판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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