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외국인 노동자 문제가 심심찮게 매스컴에 오르내린다. 이것은 한국자본주의의 규모가 커졌다는 방증인데, 한편 우리의 마음은 더욱 착잡해진다. 우리나라에 인종분규가 없다는 점은 축복이지만, 「단일민족」 신화가 다른 인종과 어깨를 겯고 살아가는 데는 매우 서툴게 만들고 있어서, 더구나 한국자본주의가 아직 천민적 성격을 청산하지 못한 터라, 그것이 혹시 고약한 인종주의로 치닫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김소진의 「달개비꽃」(현대문학 4월호)은 아마도 우리 소설에서는 처음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간 작업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에는 나이지리아 출신 아지드라는 흑인 노동자가 등장한다. 한국 생활 3년째지만 우리말이 유창한 그는 이미 프레스공장에서 손가락 몇 마디를 먹히고 이곳 제사공장에서 일하는 불법 체류자인데, 그 가계가 흥미롭다. 미국의 흑인 노예였던 그의 선조가 노예에서 해방된 후 아프리카로 복귀했던 것인데, 이제 그 자손인 아지드는 한국땅으로 건너왔던 것이다. 물론 이번에는 그의 선조와는 달리 자발적으로 떠난 것이지만, 「노예 아닌 노예」로 살아가는 그의 처지는 그 선조와 상통한다. 한국에 오기 전, 아지드가 인력송출회사에 지원했을 때를 회상하는 대목은 가관이다. 한국인 시험관이 흑인 지원자들의 웃통을 벗기고 입안을 벌려 이를 검사하고 손으로 어깨나 팔꿈치를 세게 눌러 신음하거나 비명을 지르면 다 떨어뜨린다니, 이는 현대판 노예상인이 아닌가? 「아지드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그런 시험을 거쳐 팔려갔을 자신의 할아버지 생각도 나고 해서 한참 슬펐다고 말했다」. 어떤 점에서는 미국보다 더 인종차별적인 한국에서 그럼에도 그는 왜 귀국하지 않는가? 대답은 명쾌하다. 『여기서 돈 많이 벌어야죠』
그런데 이 작품은 오늘날 외국인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작가는 공장장 기태의 눈을 작품의 중심에 둔다. 기태는 아지드를 통해서, 아지드에 앞서서 어두운 고통의 세월을 통과해온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것이다.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생모와 떨어져 누이와 함께 큰어머니 슬하의 기지촌 근처 마을에서 자랐던 유년의 기억은 그가 오늘날 공장장이 되기까지의 반생의 과정을 짐작케 하는데, 이 점에서 외국인 노동자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거울이다. 이 문제를 올바로 해결하는 정도가 자신의 과거를 잊고 흥청대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가늠하는 지표의 하나라는 인식을 다시금 새로이 하면서, 우리 소설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는 김소진의 다음 작업에 큰 기대를 걸고 싶다.<최원식 문학평론가·인하대교수>최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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