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대참사의 사흘째 되는 날 이른 아침 사고원인이 수사기관에 의해 밝혀졌다는 조간신문을 읽었다. 분노와 울적한 심정으로 혜화동 대학로를 지나게 되었다. 어제 밤인지 새벽엔지 양쪽 인도에 버려진 쓰레기로 길거리는 매머드쓰레기장 같았다. 눈뜨고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가스폭발의 원인이 말뚝박기공사중 지하에 매설된 도시가스관을 파손했다는 것이나 더 큰 원인은 따로 있다. 우리 사회의 안전관리 불감증에 있다고도 하겠지만 보다 깊은 까닭은 바로 그 대학로의 쓰레기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다는 퇴락된 생활태도, 풀어질대로 풀어진 사회기강, 황폐된 사회윤리, 이런 것들이 뒤엉켜 이 참사를 부르게 한 것이다.선진국 진입의 선두주자라 하고 국민소득 1만달러를 코앞에 두었다고 대견해 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의 정신적 문화수준은 도시가스니 지하철이니 하는 현대적인 문명생활을 영위해 나갈 자격에 미달된다는 느낌이다. 분수에도 맞지 않는 일들을 벌여놓아 끔찍한 희생만 내고 있다는 자괴심마저 든다.
우리는 동란의 참화를 딛고 일어나 지난 수십년간 보다 잘 살아보겠다고 너무 정신없이 서둘러 왔다. 마치 전쟁터에서 산마루의 고지를 점령하듯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수단이 무시를 당했다. 그러면서도 진정 왜 그랬어야 하는지를 모르는채 지내왔다. 또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 정보사회로 현기증나게 회전하는 과정에서 가치의 뒤바뀜이 험하게 일어났다. 그리하여 민주주의를 외치면서도 인간의 존엄과 인명의 존중과 같은 고귀한 기본이념이 외면당해왔다. 고지점령을 위해 구성원중 다소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여겨져왔다. 그리고 점령의 성과가 나왔을 때 지휘자는 영웅의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실은 인간 하나 하나는 결코 그 점령의 수단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전쟁을 미워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리 우리를 잘 살게 해주겠다는 국가목표가 있다 해도 국민의 한 사람인 인간의 존엄성은 최고의 가치로 여겨져야 한다. 작금의 대형사고가 모두 안전관리 소홀에서 일어났다면 그 밑바닥에는 바로 인간경시의 풍토, 즉 모두를 위한 일부의 인명손실은 긍정될 수 있다는 의식이 깊게 깔려 있다.
그러한 그릇된 의식은 또 윤리적 가치를 파괴하고 도덕률도 무너지게 하여 패륜적 범죄를 횡행하게 했다. 그리하여 이러한 희생자들은 낙오자로만 보여지게 되고 다 함께 행복해야 한다는 공동체의식도 무너져 버렸다. 대학로의 쓰레기도 그 단면이다. 남이야 어찌 되든 세속적인 승리자만이 위대하게 비쳐왔기 때문이다.
큰 사고가 있을 때마다 정부는 즉각 사과성명을 낸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 헌법의 선언이 결코 국민이 전제자의 제물이 될 수 없다는 정치적 자유보장의 뜻으로만 풀이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으로서의 고유의 존엄성이 국가에 의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대구참사에서도 정부는 재발방지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고 언론은 구호행정이라고 지탄한다.
그러나 그 재발방지책이란 목전의 재해대책에 끝날 일이 아니다. 오늘의 이 불행은 어제그제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시기인즉 국민학교 현관에 수출 1백억달러의 큰 간판만 걸리고 「잘 살아보세」의 행진곡이 울려퍼지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외침이 한가한 넋두리로 들렸을 때로 소급된다. 지금 정부는 개인의 창의성이 계발되는 교육개혁을 단행하겠다고 한다. 물론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에 보태어 더 소중하고 시급한 일은 혼돈된 가치관을 바로잡는 인간존중의 교육, 그리고 건전한 민주적 국가관의 확립이 교육지표로 되어야 한다.
창의력의 발휘로 과학기술이 진흥된다 해도 인간이 소외당하고 인간의 실존이 위협받게 된다면 의미가 없다. 인간존중의 사상을 심어주는 교육이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생명의 안전, 생활의 보호, 자유의 신장을 위해 국가를 만들었음을 깨닫는 위정자를 만들어내는 교육이어야 한다. 그 교육은 학교교육에 그칠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지난 날의 인간경멸의 낡은 생각에서 눈을 뜨게 하는 피교육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을 서로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이념을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이번 참사가 결코 몇 사람의 잘못만이 아니라 이 잘못된 사회의 흐름속에 호흡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책임임을 통감하면서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올바른 방향으로의 의식전환의 대역사가 바로 착수되어야 한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살아가려는 막된 풍조가 이 땅에서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변호사·전대한변협회장>변호사·전대한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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