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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거영광 재현” 드높은 민족 자존심(통일3국을가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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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거영광 재현” 드높은 민족 자존심(통일3국을가다:14)

입력
1995.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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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론 부인불구 거리선 민족주의욕구 고조/불,96년 EU헌장개정 앞두고 독 경계 눈초리최근 독일에 주재하는 외교관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변화가 하나 있다.이 변화는 그토록 영어를 잘 하던 독일관료들이 공석에서는 좀처럼 영어를 사용치 않고 독일어 사용을 고집하는데서 유래한다. 지금도 민족주의라는 말은 독일에서 금기시 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인들의 행동에서는 통일후 고양되고 있는 민족적 자부심이 스스럼 없이 드러난다.

90년10월 통일이 완성됐을 때 콜총리는『독일의 통일은 유럽통합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통일은 과거 비스마르크가 이룬 통일처럼 민족주의적인 욕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해 독일정부가 펴낸 통독4주년 보고서는『독일통일은 유럽의 정치적 통일에 결정적인 힘을 부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건의 현장에서 들리는 생생한 목소리는 이같은 공식적인 입장과는 사뭇 다르다.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역사의 도시 드레스덴에서 통일수도 베를린에 이르기까지 망치를 든 독일인들은『50년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사를 한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독일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같은 풀뿌리의 목소리와『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미래를 위한 통일』이라는 고위당국자들의 말과의 모순에 의문을 품을수 밖에없다.

통일후 인구3백50만의 거대도시가 된 베를린시청 건설국의 도시계획 전시실.한스 스팀만국장등 시관계자들이 면적8백80여㎢의 전시가지를 가로세로 4로 축소한 모형위에서 재건계획을 설명했다. 노랗게 칠해진 재건대상건물이 전체의 3분의1을 차지한다. 역사적으로 베를린의 심장부였던 포츠담광장은 베를린장벽이 가로질러 세워지는 바람에 황무지가 돼있다.

그러나 바로 이곳에 다이뮬러―벤츠, 소니, 스위스의 ABB등 다국적 기업의 유럽본부건물이 들어서기 위해 거대한 토사더미가 쌓이고 크레인들이 장사진을 치고있다. 여기에다가 베를린주정부는 인접한 브란덴부르크주와 합병을 합의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는 바로 과거 프로이센 제국의 중심부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팀만국장에게『50년전으로의 복원이라는 것은 독일제국을 재현하자는 뜻도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묻자 이내 정색을 한다. 그는 다른 많은 독일관료들처럼 『나는 독일국민이면서 항상 유럽국민이다』라는 아데나워의 말을 노래처럼 되풀이 한다.

본에서 만난 디 벨트지의 마르틴 람베크지국장은 높아진 독일인의 콧대를 유감없이 과시한다. 그는『중부유럽(구동구)국가들이 독일에 정치적 리더십을 강화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면서『주변국의 요구를 달래는 것이 독일의 커다란 고민』이라고 한술 더뜬다. 독일이 통일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시기에 폴란드, 체코, 헝가리등 중부권은 독일에 대한 경제적 종속을 오히려 심화 시켰다. 이제 어느나라 언론도 이 지역을 마르크권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96년 유럽연합 헌장개정을 앞두고 독일은 정치적통합을 우선시키려하는반면 프랑스는 통화단일화등 경제적통합을 우선시키겠다는 입장이다. 독일통일후 양국의 입장이 도리어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12월 독일을 방문했던 이홍구현총리는『독일인들은 베를린을 워싱턴, 모스크바, 그리고 과거의 런던과 같은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면서『세계가 독일을 알아주어야 한다는 욕구가 강하게 일어나고 있는것 같다』고 말했다.

◎통일수도 재건 어떻게 되나/베를린 옛모습 되찾는다/고층 신축제한 시민 기꺼이 감수/정부·의회 등 낡은구청사 입주도

통일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고민이 많았다. 지난49년 독일연방공화국이 굳이 한적한 소도시 본을 수도로 삼았던 것은 어느 도시도 베를린을 대체해서는 안된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90년8월 체결된 통일조약은 제2조에 『독일의 수도는 베를린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정작 통일이 되자 관료와 기업인들은 베를린으로 가기를 꺼려했다.황폐해진 시가지를 어떤 식으로 재건하는가에 대해서도 첨예한 논쟁이 일었다. 90년대 중반이면 끝날 것으로 전망되던 수도이전은 결국 오는 98년에 시작돼 2000년에 완료될 예정이다. 연방상원과 하원에서 정부와 의회이전에 관한 「베를린―본」법안이 통과된 것은 통일후 4년이 지난 94년3월이다.

분단되기전 베를린의 중심지는 브란덴부르크문의 동쪽인 소련군 점령지역이었다. 40여년의 공산통치아래서 이지역의 구건물은 방치됐고 중심거리인 프리드리히가에는 서방기준으로는 쓸모없는 소련식 고층건물만 들어섰다.우선 동베를린지역을 계속 중심지역으로 삼느냐 여부로 논쟁이 일었고 다음에는 베를린에 초현대식 시가지를 건설하느냐, 옛모습을 복원하느냐 여부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결국 베를린시정부는 콜정권의 강력한 지지속에「복고주의」를 택했고 신축건물의 높이를 22.5로 제한키로 했다.본에서 이전해올 12개 연방부처와 의회, 16개연방주의 대표부는 모두 구독일제국의 정부건물을 보수, 입주하도록 했다. 신축되는 정부건물은 총리실과 외무성뿐이다.해군본부의 경우 프로이센제국 시절의 낡은 국방부 석조건물로 들어가야 한다.

이같은 정책때문에 베를린의 1인당 사무실면적은 3.5㎥로 함부르크의 절반밖에 되지 않지만 독일인들은 이를 기꺼히 감수한다.

서베를린도 고민은 마찬가지이다. 많은 서독인들의 눈에는 동독인뿐아니라 서베를린 시민들도 「2등국민」이다.분단후 서독정부는 인구감소를 막기위해 서베를린시민에게 병역혜택과 위험수당격의 재정보조를 지급해왔다. 이때문에 서베를린에는 과거의 베를리너와는 다른 「거대한 소비집단」이 모여들었고 현재도 좀처럼 그 체질이 바뀌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베를린=유승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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