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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베를린 한」 바르셀로나서 말끔히(광복분단 50년: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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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베를린 한」 바르셀로나서 말끔히(광복분단 50년:29)

입력
1995.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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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황영조 36·92년 올림픽 제패/한민족역량 세계과시… 7분대 눈앞 92년 8월10일은 한국스포츠사에 영원히 남을 날이다. 황영조가 손기정이후 56년만에, 태극기를 달고는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을 제패한 것이다. 광복이후 한국스포츠는 괄목한 만한 성장을 거듭하며 세계만방에 한민족의 우수성을 떨쳤다. 그 셀 수없이 많은 쾌거가운데 한국스포츠의 잠재력를 세계에 가장 먼저 알린게 마라톤이었고 정점을 이룬 것도 마라톤이었다. 그래서 손기정의 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우승과 황영조의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제패는 한국스포츠의 다른 어떤 업적보다 귀중하고 스포츠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많은 스포츠 가운데 마라톤만큼 민족성을 짙게 깔고 있는 것도 없다. 손기정의 36년 베를린마라톤 제패는 일제하 피압박민족의 설움을 씻어주는 청량제였고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었다.

 마라톤은 광복이후에도 국제스포츠무대에서 한국의 존재를 가장 먼저 알리며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이는 계기를 만들었다. 태극기를 처음 가슴에 달고 국제대회에 나선 서윤복이 47년 4월19일 세계최고권위를 자랑하는 보스턴마라톤에서 우승하고 50년대회에서도 함기용 송길 최윤칠이 나란히 1, 2, 3위를 휩쓸어 동양의 작은나라 한국을 전세계에 알렸다.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는 황영조가 일본선수를 따돌리고 1위로 골인, 민족의 역량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잦은 외세의 침략에 굴하지 않은 한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은 마라톤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온 셈이다.

 한국 마라톤의 역사를 살펴보면 시조는 1927년 조선신궁대회서 우승한 마봉옥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어 32년에는 LA올림픽에 김은배와 권태하가 출전, 36년 베를린올림픽제패의 초석을 다졌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베를린올림픽에 비록 일장기를 달고 출전했지만 금메달과 동메달을 차지해 마라톤한국의 잠재력을 확인시켰다.

 이후 암흑기에 들어갔던 한국마라톤은 광복과 함께 다시 부활했다. 손기정 남승룡이 만든 마라톤보급회를 통해 성장한 서윤복이 47년 보스턴대회에서 기적같은 승리를 이끌어내 36년올림픽의 감격을 재현했다. 36년 손기정의 우승에 깊은 향수를 갖고 있던 국민들은 서윤복의 장거에 또 한번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어 50년 같은 대회에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금, 은, 동을 모두 휩쓸어 한국마라톤은 황금기를 맞았다. 52년 헬싱키올림픽 마라톤에서는 최윤칠이 4위에 오르고 58년 도쿄아시안게임에서 이창훈이 전통을 이었다. 이창훈은 일본 선수들을 모조리 따돌리고 1위로 골인, 한국마라톤사상 처음으로 아시안게임 마라톤우승의 주역이 됐다. 60만 재일동포(당시)의 한을 달래주었다는 점에서도 이창훈의 우승은 값진 것으로 평가된다.

 이후 한국마라톤은 좌절의 시기를 맞았다. 김복래 김차환 문흥주 등이 분투했지만 높은 세계의 벽을 넘지 못해 국제무대에서 한국마라톤의 존재는 거의 잊혀졌다. 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과 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에서 김량곤 김원탁이 우승, 체면을 세우는데 그쳤다.

 30년이상 침체에 빠져있던 한국마라톤은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다시 꽃을 피웠다.

 90년들어 김완기 김재룡이 한국마라톤의 기록을 2시간9분대로 진입시키며 세계정상 재정복의 기틀을 다지자 황영조가 92년 8월10일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몬주익신화를 창조하며 손기정이후 56년만에 월계관을 다시 쓰는 위업을 이룩한 것이다.

 이날 새벽 황영조가 일본의 모리시타와 숨막히는 접전을 펼치는 모습을 TV로 지켜보는 국민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결승점 2를 남기고 내리막길에서 황영조가 모리시타를 따돌리고 메인스타디움에 들어서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제히 함성이 메아리쳤다.

 김완기의 92년 뉴욕마라톤3위, 김재룡의 93년보스턴마라톤 2위 입상에 이어 지난해 일본에서 벌어진 아시안게임에서 국민의 영웅 황영조는 히로시마 하늘에 태극기를 올려 또한번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한국마라톤 기록변천사/66년 김복래 2시간19분07초/74년 문흥주 2시간16분15초/94년 황영조 2시간8분 09초

 한국마라톤은 제2의 황금기를 맞이하며 기록면에서도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1927년 마봉옥이 3시간29분37초로 가장 먼저 42.195풀코스를 완주한 이후 김은배가 1931년 처음으로 20분대(2시간26분12초)에 진입했다. 35년후인 66년 김복래는 2시간19분07초의 기록을 세워 20분벽을 돌파한 첫번째 선수가 됐다.

 74년 문흥주가 수립한 2시간16분15초의 한국최고기록은 10년간 요지부동이었다가 84년 이홍렬이 1분16초 단축하면서 기록경신에 불이 붙었다.

 92년에는 황영조가 일본 벳푸 오이타마라톤대회에서 2시간8분47초의 놀라운 기록을 작성, 한국마라톤의 기록을 8분대에 진입시켰다. 94년 김완기가 2시간8분34초의 새 한국기록을 작성하자 황영조는 같은해 보스턴대회에서 2시간8분9초를 기록, 이제 7분대를 눈앞에 두게 됐다.

 이 기록은 역대세계랭킹 18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88년 벨라이에 딘사모(에티오피아)가 작성한 세계최고기록(2시간6분50초)에 불과 1분19초 뒤진 것이다.<정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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