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금강산” 철길은 끊긴채 흔적만…/순안가도엔 김일성추모 ◆평양에서 입간판 즐비/북-미 통화료 비싸 주민들 “그림의 떡”/탱크저지물 사이로 봄농사준비 한창
고려항공전세기는 23일 하오 2시50분 평양의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LA 전금여행사 평양축전 참관단의 일원으로 LA를 출발한지 33시간 만이다.
공항청사 정면에는 김일성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날씨는 화창했다. 4월의 싱그러운 봄바람이 불어왔고 개나리와 진달래가 곱게 피어 있었다. 공항건물은 아담했고 깨끗했다. 장사진을 이루며 사람의 진을 뺐던 베이징공항과는 완전히 달랐다.
참관단 일행은 모두 56명. 데보라 왕 베이징특파원등 ABC TV취재팀 5명과 마지막까지 비자를 받지 못해 애를 태우던 LA타임스의 한국인 사진기자 강형원씨도 끼여 있었다.
순안공항의 통관절차는 철저했으나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일행은 두대의 관광버스에 나눠타고 숙소인 양강호텔로 향했다. 평양으로 가는 순안가도에서 차창으로 본 평양근교는 아름다웠다. 개나리꽃과 살구꽃이 만발했고 신록은 푸르름을 더해 가고 있었다. 20여 를 달리는 동안 김일성이 언급된 구호는 많이 보았으나 김정일과 관련된 구호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간판속의 김일성은 웃는 얼굴이었다.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소속이라는 안내원은 『주석님은 가셨지만 우리 가슴속에 영생하고 있다』고 울먹일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김일성을 추모하는 간판은 김의 사망이후에 더욱 많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일행이 호텔에서 짐을 푼뒤 맨먼저 안내된 곳은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였다.
평양에서의 첫밤은 잠이 오지 않았다. 자꾸만 비행기속에서의 흥분된 분위기와 베이징공항에서의 들떴던 장면이 되살아났다.
비행기 안에서 『바로 아래보이는 강이 압록강입니다. 그리고 저기보이는 댐은 수풍댐입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평양이 고향이라는 한 노인은 굵은 두줄기의 눈물을 흘렸다. 소풍가는 학생들처럼 다소 어수선했던 비행기안의 분위기가 일순에 조용해졌음은 물론이다.
◆금강산에서
금강산은 듣던대로 아름다웠다. 골짜기와 봉우리 그리고 개울의 아름다움은 단연 빼어났다. 일행은 「금강내기」라 불리는 봄바람이 세차게 불어제끼는데도 왕복 8의 산길을 걸어 구룡폭포에 다녀왔다.
안내원 백순희(33)씨는 신바람이 난듯 금강산에 얽힌 얘기들을 줄줄이 엮어 나간다. 『떨어지면 폭포요, 흩어지면 구슬이요, 누우면 비단필이요, 고이면 담소고 마시면 약수가 바로 금강산의 물입니다』 그의 입에서는 금강산 봉우리와 골짜기에 관한 전설이 쉬지 않고 흘러나온다.
남북간의 언어단절이 생각보다 심하다는 점은 가슴을 아프게 했다. 구룡폭포앞에서 만난 음료판매원들은 「마누라」가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음료판매원들은 3년제 전문학교나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여성들이었다.
평양에서 원산을 거쳐 금강산까지는 왕복 6백16. 잘 닦여진 왕복 4차선 고속도로였으나 차량왕래는 한산했다. 철길은 흔적만 보일뿐 끊어져 있었고 해안가 에는 이중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그러나 금강산으로 가는 여정에서는 한국의 60년대를 연상케 하는 순수함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넉넉한 살림이 아님은 한눈에 알수있었지만 자연은 오염되지 않은채 잘 보존돼 있었다.
금강산 호텔에서 미국으로 기사를 송고하는데 애를 먹었다. 터치폰을 누르면 곧바로 LA의 한국일보 미주본사가 나왔던 평양과는 달랐다. 팩스도 없었다. 평양교환을 통해서 겨우 기사를 보낼 수 있었다. 전화도 감이 나빠 얼마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는지 목이 아팠다.
22분통화에 북한돈 3백45원(미화 1백72달러, 한화 13만원정도)을 냈다. 3분에 22달러50센트이고 매분당 7달러50센트가 추가됐다. 미국과 북한간의 전화가 가능해졌지만 이처럼 비싼 전화요금은 북한주민에게는 미국과의 통화가 그림에 떡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개성·판문점에서
일행은 26일 판문점을 찾았다. 비무장 지대로 통하는 문앞에서 일단 브리핑을 받았다. 안내를 맡은 김광길인민군소좌는 콧날이 오뚝했다. 그는 북측의 주장을 설명했다. 북측 비무장지대 도로 곳곳에는 탱크 저지물이 설치돼있었으나 주변 논에서는 주민들이 봄철 농사준비에 한창이었다.
북쪽에서 거꾸로 거슬러 내려와 판문점을 찾았다는 「죄스러움」때문에 더욱 긴장해있는듯 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국군이 자유의 집 앞에서 망원경으로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
참관단은 정전위 건물에 들어가 마이크 줄로 나눠진 남북한 땅을 마음대로 왕래할수 있었다. 휴전협정이 서명된 역사의 현장을 사진에 담느라 분주했으나 우리는 「관광객」에 불과했다.
우리 일행 50여명중 부부는 3쌍이었다. 85세 노인이 최고령자였고 나머지 대부분은 50대 이상의 남자였다. 그들이 북쪽을 찾은 이유는 각각이었다. 순수관광이 있는가 하면 비즈니스 탐색이 있고, 그 보다는 행여 가족의 소식을 들을수 있을까, 운이 좋으면 얼굴이라도 한번 볼수 있지않을까하는 숨은 소망을 가진 이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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