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국 참전거부로 한국 떠맡아/64년 첫 파병… 8년간 31만여명 동원/전투병력 파견 따른 대가 얻어/73년 휴전협정 직전 철군 발표 한국군은 64년 9월부터 73년 3월까지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미국과 월남이 월맹과의 휴전협정 체결을 앞두고 실질적으로 전투작전을 중단했을 무렵인 72년말 파월한국군의 숫자는 3만6천8백60명. 당시 미군 2만4천여명 보다 훨씬 많았다. 「미국의 전쟁」이라 불린 베트남전에서 한국은 미군보다 많은 숫자가 싸울 때도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전쟁」이란 말은 미국이 베트남전쟁의 군사·정치적 측면을 전적으로 책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초 미국의 대통령과 정책결정자들은 우방국의 참전과 지지를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참전대상은 유럽국가였지 한국은 아니었다. 한국의 참전은 베트남에서의 「미국실패」의 가장 역설적인 증거라 할수있다.
54년 이승만대통령은 주한미군의 부루스 클라크중장에게 라오스에 있는 프랑스군을 구하기 위해 한국군 1개사단을 월남에 보내겠다고 제의했다. 미국무부는 이제안을 즉각 거절했다. 10년뒤 사정은 달라졌다. 미국은 64년 5월 한국에 이동외과병원의 파견을 요청했다. 한국은 이해 9월 1개 의무중대와 10명의 태권도 교관등 비전투요원을 월남에 보냈다. 첫 파병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전투병력이었다. 린든 존슨대통령은 미국내 여론때문에 전쟁터에 미국 청년을 보내는데 매우 주저했다. 64년 12월 미국행정부의 고위 정책결정자들은 제3국 전투병력의 파병을 최초로 공식논의했다. 한국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나라도 미국의 참전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65년 3월 맥너톤국방차관보는 처음으로 한국전투병력의 배치를 제안했다. 로버트 맥나마라국방장관은 『한국군 사단배치는 미군 추가배치에 따른 국내여론의 반응을 위해 필요하다』며 한국군 참전의 기본목적을 명백히 했다. 미군 대안찾기가 한국참전으로 결론난 것이다. 당시 윈드롭 브라운주한미대사는 한국 끌어들이기를 가장 강력히 반대했다. 멕스웰 테일러주월미대사도 월남의 반대를 전했다.
월남이 마지못해 동의를 하자 존슨은 박정희대통령에게 파병을 요청했다. 65년 5월17,18일 워싱턴에서 두사람은 만났다. 두지도자의 계산은 일치했다. 한국은 전투병력 파견에 대한 대가를 원했으며 미국은 그 대가가 아무리 비싸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드디어 이해 10월 첫번째 전투병력인 해병2여단의 월남상륙이 이뤄졌다.
청룡·백마·맹호부대등 한국군은 8년여간 31만2천8백53명이 참전했다.한국군은 1천1백70회의 대규모 작전과 55만6천회의 소규모부대 단위작전을 치렀다. 적사살은 4만1천여명, 전사자는 4천6백87명이었다. 한국군의 주임무는 주로 방어였다. 제한된 지역에서 경계와 정찰·수색작전을 수행했다. 이러한 전투방법은 월등한 사살률에도 불구하고 효용성과 효율성에 대한 미군의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미군은 『한국군은 작전준비는 길게 하나 실행은 너무 짧다. 그러면서 군수 및 화력지원은 너무 많이 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특히 일부 군인들의 잔학성과 부정은 논란거리였다. 웨스트모어랜드주월미군사령관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한국군의 부패에 대해 언급할 정도였다. 그러나 31만여명에 이르는 참전용사의 경험은 한국군 발전에 소중한 밑거름이었다. 68년 미국내 반전여론이 거세지면서 파리평화협상이 시작됐다. 우여곡절 끝에 73년 1월27일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이에앞서 73년 1월24일 박대통령은 파월국군 철수를 발표했다. 한국군이 떠난지 2년이 지나 월남은 무너졌다. 75년 4월30일이었다.<손태규 기자>손태규>
□베트남 참전·철수일지
◆64년 7월31일 제44회 국회,국군 비전투요원 해외파견에 관 한 동의안 가결
◆64년 9월22일 제1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 교관단 사이공 도 착
◆65년 5월17일 박정희대통령 존슨미대통령과 워싱턴서 국군 월 남전 참전 논의
◆65년 10월9일 첫 전투병력 청룡부대(해병2여단) 캄란상륙
◆65년 10월22일 맹호부대(수도사단) 퀴뇬상륙
◆66년 9월25일 백마부대(9사단) 나트랑상륙
◆71년 12월4일 제1단계 1진 철수
◆72년 8월1일 주월사령관 한국군 철군방침 주월미군사령관에게 통보
◆73년 1월24일 박정희대통령 파월국군 철수지시
◆73년 3월23일 철군완료
◎베트남 참전 후유증/고엽제 피해자 3만5천∼4만명 추정/혼혈아 「라이 따이한」 눈물과 한 멍에로
월남전의 상흔은 종전 20주년을 맞는 지금도 남아 있다. 숱한 파월 장병들이 고엽제후유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고, 베트남 땅에는 한국인들이 남긴 혼혈 「라이 따이한」이 한을 품은채 아버지의 나라를 그리며 살고 있다. 월남전은 단순히 지나간 시절의 악몽이 아니다. 정부의 공식집계에 의하면 월남전에 참전한 64년 9월부터 75년 4월까지 이역 정글에서 희생된 참전 장병은 4천6백23명이다. 자유와 평화를 위한 고귀한 희생으로 애도됐던 전몰 용사들이 흘린 피는 월남전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는 무관하게 조국의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참전 장병중 많은 이들이 아직도 전쟁의 후유증과 싸우고 있다.
미군이 밀림제거를 위해 무차별 살포한 고엽제의 후유증으로 간암 전신마비 악성피부염등을 앓고 있는 파월장병은 보훈처에 접수된 숫자만 3천8백76명이다. 이들중 3백99명이 고엽제 후유증 환자로 판정됐고, 1천2백37명은 의증)환자로 분류됐다.
그러나 「파월유공전우회」는 고엽제 후유증환자가 3만5천∼4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월남전 참전미군 2백50만명의 10%가 넘는 30만명이 고엽제 피해자인 것을 근거로 추산한 숫자다. 보훈처는 말초신경병·폐암·연조직 육종암등 10개 질병이 나타난 피해자에게는 치료비와 월 30만∼1백20만원의 연금을 지급하고 있다. 그러나 기형아로 태어난 2세들은 유전여부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외면되고 있다.
월남전은 역사상 어느 전쟁보다도 참전 장병들에게 깊은 정신적 후유증을 남겼다. 전선이 없고 적과 아군의 식별이 어려운 정글전은 유례없이 극심한 「전투 공포증」을 장병들에게 안겼다. 또 전쟁 목적과 전쟁수행 방식에 대한 도덕적 회의가 높은 상황에서 갈등을 겪었던 참전 군인들은 사지에서 돌아온 뒤에도 정신적 방황을 거듭하다 끝내 자살을 택한 경우까지 있다.
68년 백마부대 수색중대 소속으로 파월됐던 김모(47·부산 남구 용호4동)씨는 귀국직후부터 정신착란증세를 보이는 전쟁 공포증 환자다. 김씨는 요즘도 TV에서 전투 장면이 나오면 갑자기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김병장 엎드려』라고 절규하며 포복자세를 취하는등 착란을 일으킨다. 베트남의 라이 따이한은 5천∼2만여명으로 추산된다. 역사상 최초의 해외 참전에 우리가 남긴 라이 따이한의 눈물과 한은 6·25전쟁의 비극적 산물인 수많은 혼혈아를 안고 있는 우리로서는 결코 외면해서는 안될 멍에다.
정부는 92년 수교를 계기로 라이 따이한을 위한 직업훈련원을 설립하는등 지원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나 민간 모두 이들에게 「핏줄」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진 않고 있다. 앞으로 이 문제는 「부도덕한 전쟁」에 휩쓸렸던 우리의 도덕성에 대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특별기고/안병찬씨/“옛 전쟁터가 이젠 장터로 냉전시대 「반공십자군」 참전의미 되새겨봐야”
해마다 4월말이 오면 나는 이글거리는 태양을 그리게 된다. 여느날과 마찬가지로 강렬한 햇살을 퍼붓기 위해 중천을 향해 떠오르는 사이공의 태양이다. 그리고 한조각 뭉게구름을 본다. 밝은 햇살이 돌연 그 검은 구름에 가리우고 뇌성을 울리며 스콜이 쏟아진다. 그토록 빗줄기는 패연하고 태양은 유장한 가운데 사이공은 소멸했다.
1975년 3월23일, CPA 601편으로 다시 베트남 하늘에 진입하면서 내가 내려다 본것은 짙푸른 캐시밀론 정글이었다. 그때 이미 북베트남의 최후대공세는 파죽지세여서 남베트남은 1백만 피난민의 대엑서더스와 함께 붕괴되고 있었다.
그 위험한 밤길에 나를 내보낸 것은 한국일보 장기영창간 발행인이었다. 나중에 그는『이미 해가 떨어진 월남밤길에 특파원을 내보낼때 나로서는 깊이 계산했던 것』이라고 호언한바 있으나, 실은 등을 밀어 나를 어두운 길에 보내놓고는 이만저만 노심초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이공 패망의 날인 4월30일 새벽4시10분, 내가 마지막 헬리콥터로 탈출해 귀환한후 다음달에 내놓은 르포르타주「사이공 최후의 새벽」권두언에서 장기영발행인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안특파원이 4월29일 상오 10시30분 사이공 최후의 새벽을 타전하고 연락이 두절된 1백20시간동안 나는 물론 불안하였다. 최병우특파원을 잃은 불운과 상처의 아픔이 심장주위에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안군의 무사탈출엔 자신을 가지고 그의 가족에게 되묻기까지 하였다…』
그로부터 14년. 1989년 4월말 나는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되어 비로소 호치민시로 이름이 바뀐 사이공을 찾을수 있었다. 그때 취재목표는 4월의 마지막날, 「도시해방기념일」에 맞추어 어떻게든 호치민시에 들어간다는데 두었다. 방콕 돈 무앙 국제공항에는 남국의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 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사이공의 태양을 연상시켰다.
나를 호치민시로 실어갈 베트남항공의 소련제 TU135기를 향해 달리는 공항버스 속에서 쏟아져내리는 일광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그순간 가슴속을 관통하듯 찌르르 전류가 흘러갔다. 눈앞에 서있는 베트남 귀향인들의 모습이 눈부신 차창밖 일광을 배경으로 실루엣을 그리고 있었다. 가슴을 지나간 전류는 사이공과 14년만에 만나는 감정표현이었다.
1992년 12월22일, 하노이의 한국대사관에 태극기가 다시 걸렸다. 내가 사이공 대사관에서 마지막으로 태극기 내리는 장면을 찍은지 17년8개월만이었다. 나는 비로소 남지나 해상의 의문이 풀림을 느꼈다. 75년4월30일 새벽 사이공에서 밀려나와 피난민 6천1백44명이 콩나물처럼 실린 미군 피난선 서전트 밀러호로 남지나해 1천8백를 건널때, 아득한 수평선에 피어 오르던 궁금증이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필리핀사이에 가로놓인 남지나해는 앞으로 소련 미사일함의 수로가 될까. 중·소 이해대립을 염두에 두고 새로운 세계질서를 편성한다는 미국의 구상은 어떻게 펼쳐질까. 사이공정권의 최후를 출발점으로 한 아시아의 시작은 무엇일까. 눈앞에 서리던 미지수의 안개는 앞을 헤아리기 어렵도록 두터웠으나 이제 말끔히 걷힌 것이다.
작년 9월에 재차 호치민 시를 찾아갈때 탑승한 항공기는 멀리돌던 20년전과는 사뭇 다르게 중국본토 상해위를 지나는 쿤밍루트와 베트남의 다낭을 가로 지르는 호치민 회랑을 타고 직항했다. 이달중순, 20주년을 기해 한국을 방문한 혁명1세대 도 두모이 당서기장이 세일즈맨 정치인 행세를 한 것에서 나는 아시아의 전쟁터가 이미 장터로 뒤바뀌었음을 실감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 베트남에서의 과거에 부채가 있다. 미국에서 나온 맥나마라 회고록이 베트남 개입결정의 실수를 후회하는 내용이어서 「맥나마라 휴머니즘」이라고 일컬어지는 터에, 냉전시대 「반공 십자군」의 명분으로 참전한 뜻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또 피의 대가를 달러에서 구했다는 「경제적 용병」에 대한 엄격한 도덕적 물음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심신을 파괴당한 수많은 고엽제 희생자의 신음소리는 호치민시가 여전히 이글거리는 태양과 패연한 빗줄기속에 재해방된 오늘도 고통스럽게 들려온다.<고재학 기자>고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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