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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소가 손에 손 잡고(박완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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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소가 손에 손 잡고(박완서 칼럼)

입력
1995.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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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가뭄과 심한 황사현상 끝에 안개비가 오다말다 하던 날이었다. 비같지도 않은 비라 손자하고 산책을 가면서 우산을 쓰지 않았다. 어린 것의 손을 잡고 급한 일 없이 어슬렁거리는 것도 노후의 조용한 낙중에 하나이다. 아이의 손은 어쩌면 그렇게 방금 움튼 새순과 닮았는지. 아이의 이런 새순처럼 작고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생명력을 감지하고 있노라면, 늙음이 아무리 흙으로 돌아갈 날만 남겨놓고 있다고 해도 그닥 서럽거나 허망할 것도 없을 것같아 슬그머니 유쾌해지곤 한다. 아이는 촉촉해진 제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나서야 비로소 비가 오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내 손을 놓으면서 길가 추녀끝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려 들었다. 나는 아이한테 그냥 비를 맞으면서 가자고 했다. 감질나게 인색한 비였지만 그래도 땅을 축이면서 풍겨오는 흙냄새는 제법 강렬하고 싱그러웠다. 그러나 아이는 비 맞으면 안된다고 했다. 왜?라는 내 물음에 아이는 엄마가 비 맞으면 대머리 된다고 했는데 할머니는 그것도 모르냐고 반문을 했다. 매스컴에서 중국의 온갖 공해물질이 함유된 황사와 산성비에 대해 연일 겁을 줄 때라 아마 즈이 에미는 어린 것이 그런 비를 안 맞도록 그렇게 겁을 준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길에 가는 사람들도 비를 태연히 맞는 사람보다는 하다 못해 신문지로라도 머리만은 가리고 가는 사람이 많았다. 기다리던 비를 보통 「단비」라고 말하지만 비가 우리 몸에도 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는 것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를 간절히 기다렸고, 그래도 간간이 내린 비로 인하여 강물은 마르지 않았고, 산과 들은 꽃피고 잎 돋았고, 한 차례의 넉넉한 비로 농사걱정을 덜게 되었다. 인간이 비맞기를 꺼린다고 해도, 자연이 비없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문득 어릴 적 생각이 났다. 가뭄끝에 오는 단비건, 지겹게 내리는 장마비건 비는 「온다」가 아니라 「오신다」였다. 누구한테도 존대말을 쓸 필요가 없는 집안의 가장 웃어른인 할아버지까지도 비한테는 존대말을 쓰셨기에, 어린 마음에도 비는 인간의 서열을 초월한 외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가장 스스럼없이 친할 수 있는 게 비이기도 했다. 집집마다 변변한 우산 하나도 없을 시절이기도 했지만, 기다리던 비가 왔을 때는 그어 가기보다 맞고 가는 걸 비에 대한 응분의 환대처럼 여겼다.

 특히 시골에서 여름에 소나기를 일부러 맞았을 때의 복받치던 환희는 잊혀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너나없이 옷입은채 하늘의 채찍같은 빗발 속으로 뛰어들어 뜻모를 환성을 지르며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더위에 지쳐 축 늘어졌던 논의 벼, 밭의 푸성귀와 동산의 나무들이 같이 춤을 춘 건 물론이다. 그때 우리는 푸성귀의 일부였고 나무의 일부였다. 아니면 목말라하던 푸성귀와 나무들의 환희가 옮아붙은 거였다. 자연과 인간과의 완전한 교감으로 말미암은 환희가 어떻다는 것을 요새 아이들이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요새 아이들은 우리 세대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온갖 문명의 즐거움을 알고 있으니 피장파장이라고 말해버릴 수도 있겠으나 현격한 자연관의 차이만은 섭섭하다 못해 두렵기조차 하다.

 젊은이들이 들으면 걱정도 팔자라고 비웃겠지만, 우리 몸에 해로운 비라면 언젠가는 자연에게도 해를 끼칠 것같은 것도 은근히 겁나는 것 중에 하나이다. 봄 되니 어김없이 꽃피고 잎돋는 아름다운 산하를 보고 내심 지나치게 반갑고 고마운 것도 언제까지나 그걸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불길한 예감때문이다. 개인수명의 한계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자연이 언제까지 인간의 학대를 참아줄까가 못내 두려운 것이다. 이 땅 어디에고 콘크리트덩어리가 동산을 뭉개거나 가리지 않은 곳은 남아 있지 않다.

 서울이 광화문을 중심으로 어떻게 달라지리라는 이른바 국가중심가로 조성계획을 들어도 반갑기보다는 허전하기만 하다. 심한 어긋남 때문이다. 내가 꿈꾸는 2005년의 서울은 그렇게 달라진 서울이 아니라 지금만큼이라도 웅장하고 아기자기하고 정정한 북한산이 남아 있는 서울이다. 새롭게 뚫린 훤한 길과 기능적으로 설계된 최신의 휴식처가 아니라 우리가 산 자취, 고통과 수모, 영광과 기개등 온갖 잊을 수 없음이 서린 장소와 길이 남아 있는 서울이다. 그때까지 오래오래 살고 싶은 욕심에서 미래의 서울을 간섭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라진 후에도 우리가 산 자취를 통해 후손과 손잡고 싶어서이다. 수도의 기능이나 외관은 급히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품위만은 오직 시간의 더께만이 은근히 만들어가는 것이기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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