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선 우파 표분열 예상밖 심각/15%득표 극우르팽표 향방 관건 23일 실시된 프랑스 대선 1차투표에서는 두가지 이변이 일어났다. 이변의 주인공은 리오넬 조스팽(57)사회당후보와 장 마리 르팽(66)극우정당후보이다.
조스팽은 1주전의 마지막 여론조사결과 발라뒤르총리와 근소한 차이로 결선에 진출할 것으로 전망됐다. 그러나 그는 약 6% 포인트나 지지율이 높았던 우파 공화국연합(RPR)후보인 자크 시라크 파리시장을 거꾸로 3% 포인트차이로 누르고 최다득표자가 됐다.
조스팽의 최다 득표는 누구도 미처 예상치 못한 결과이다. 정치분석가들은 그의 인기가 갑자기 올라갔다기 보다는 시라크의 인기가 여론조사 결과 발표가 금지됐던 한 주 사이에 크게 떨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라크는 임금인상 억제의 불가피성을 주장했던 중앙은행 총재를 비판한 것이 보수우파의 지지를 잃게 된 가장 큰 원인으로 분석됐다.
또 우파의 표분열이 예상보다 심각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가장 주목된 것은 극우파의 르팽후보가 15%의 득표를 한 점이다. 3백만에 달하는 이민근로자의 추방을 주장해온 르팽후보는 서방선진국중 가장 높은 12%의 고실업률에 허덕이는 프랑스의 현실에 편승, 88년 대선때보다 높은 득표를 했다. 따라서 르팽이 누구의 손을 들어주는가가 결선투표에 가장 큰 변수로 등장했다. 반유럽통합의 기수인 우파의 드빌리에후보도 5%를 득표, 우파의 표를 분열시켰다.
결선투표에 대한 일반적인 전망은 시라크 우세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 이유는 몇가지로 분석된다. 1차선거 결과로 볼때 좌우파의 득표분포는 약45대 55로 우파가 우세하다. 우파인 발라뒤르는 패배를 시인한 후 시라크의 지지를 선언하면서 우파의 대단결을 호소했다. 또 미테랑의 14년 장기집권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유권자들이 비록 조스팽이 미테랑과 차별성을 부각해왔다 하더라도 다시 좌파 대통령을 뽑지는 않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1차투표 마감 직후 출구여론조사에서도 시라크가 57대 43으로 결선투표에서 승리할 것으로 나타났다.
파리의 정치분석가들은 이번 투표결과를 「유권자의 반란」이라고 표현했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누구도 25% 이상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65년 현 선거제도가 도입된 이래 1위 득표자의 득표율 23%는 사상최저다.<파리=한기봉 특파원>파리=한기봉>
◎1차투표 1위 조스팽 사회당후보/“청렴” 호평… 교수출신 이념가
23일 밤 사회당사의 샴페인은 동이 났다. 그러나 샴페인을 준비하면서도 누구도 리오넬 조스팽(57)후보의 최고득표를 예상하지않았다. 조스팽은 축하파티에서 『이제 진정한 변화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사회당의 구세주로 불렸던 자크 들로르 전유럽연합(EU)집행위원장이 돌연 출마를 포기한 직후 조스팽이 스스로 출마를 선언할때만 하더라도 그는 초라하고 외로운 후보였다.
미테랑 제1기 집권기(81∼88년)에 당 제1서기를 맡고 이후에 교육부장관을 5년간 역임했으나 그는 결코 화려한 정치인이 아니었다. 미테랑은 그를 멀리했을뿐만아니라 중앙정치무대에서 성장하는 것을 견제했다. 93년 총선에서 사회당이 지리멸렬할때 조스팽도 낙선했다.
그러나 사회당의 누벨 제네라시옹(신세대)의 기수였던 그는 지난 2월 사회당후보경선에서 앙리 엠마누엘리 제1서기를 물리치고 후보자격을 쟁취했다.
조스팽은 정치인이라기보다는 학자 풍모이며 행정가라기보다는 이념가이다. 평범한 교사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프랑스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한 후 잠시 외교관으로 일하다 70년부터 10년간 파리1대학의 경제학교수를 지냈다. 미테랑이 대통령에 당선된 81년 초선의원이 된후 당내 경선에서 제1서기에 올랐다. 사회당의 거물들이 대다수 부정부패에 연루돼 있었지만 그는 몇안되는 청렴하고 깨끗한 정치인이었다. 후보들의 재산공개때 임대주택 1채와 자동차 2대가 그의 전재산이었다.
조스팽은 여론조사 결과를 비웃기라도하듯 프랑스를 놀라게 했다. 그는 결선투표에서 다시한번 가능성에 도전한다.
◎1차투표 2위 시라크 우파후보/대권도전 3수… 드골리즘 적자
자크 시라크 파리시장(62)은 1차투표 결과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한 입장이다. 대선 3수에 다시 올 수 없는 호기를 맞아 결선에 진출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최다득표 예상은 빗나가 2위에 그쳤다.
그는 프랑스 현대 정치사의 산증인이다. 76년 드골리즘의 적자로서 오늘날 최대정당이 된 공화국연합(RPR)을 창당하고 지스카르 데스탱전대통령, 미테랑현대통령과 함께 30여년간 프랑스 정치를 요리해왔다. 그러나 그는 대선에서만은 불운한 정치인이었다. 81년에 우파의 데스탱에게 결선 티켓을 넘겨주고 88년에는 결선에서 미테랑의 2기집권을 허락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그를 정계에 입문시켰던 퐁피두전대통령은 『시라크는 나의 불도저』라고 말했다. 적극적인 성격에 카리스마적인 이미지와 보스 기질을 갖춘 그는 강력한 프랑스를 주창하는 드골리즘의 후계자이다. 그는 동시에 정치적 상황과 판단에 따라 변신을 거듭하는 카멜레온의 부정적 이미지도 갖고 있다. 그의 본능적인 정치감각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별명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는 선거운동 초기에는 결선진출에 비관적이었으나 막판에 발라뒤르총리를 제치고 선두주자로 올라섰다. 보수우파의 오랜 이미지를 바꾸고 「새로운 시라크」로 변신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의 슬로건은 「모두를 위한 프랑스」였다.
시라크는 1차투표에서 예상에 훨씬 못미치는 지지를 얻었지만 여전히 앨리제궁에 가장 근접해있는 후보이다. 그는 지금 미테랑도 3번째 도전에 성공한 것을 생각하면서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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