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의 논리」앞 법-현실사이 고뇌/간첩혐의 조봉암에 “보안법부분은 무죄” 파란/「김재규 사건」 소수의견·판결문 10년후 공개/81년 대법관 대폭 물갈이후 “김대중 사형” 정치적 격변기에는 언제나 역사의 물길을 바꾼 사건들이 있었다. 이 사건들은 법정에 오기전에 물길을 막고 선 「힘의 논리」가 성격을 미리 규정, 법원은 현실과 법의 잣대사이에서 고뇌해야 했다. 그 고뇌의 결과인 판결들은 우리 법원의 영욕을 증언하고 있다.
58년 7월 서울지법 유병진판사는 간첩혐의등으로 기소된 진보당 당수 조봉암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으나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당을 조직했다」는 국가보안법위반 혐의에는 무죄를 선고했다. 『진보당의 「사회적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와는 다르며, 평화통일론도 북한의 반성을 전제해 북한의 주장과는 다르다』는 이유였다.
이 판결은 「친공판결」로 매도돼 시위대의 법원난입을 불렀다. 이어 항소심은 1심을 파기, 사형을 선고했고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이 사이 유판사는 법복을 벗어야 했다. 「법관은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한다」는 헌법정신은 유린됐다.
4·19직후인 60년 5월 ▲3·15 부정선거 ▲학생시위대에 대한 발포명령 ▲정치깡패의 고려대생 습격사건등 이른바 「6대 사건」이 법의 심판대에 올랐다. 당시 선거법이나 형사소송법상 관련 피고인들의 면소판결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혁명 입법때까지 재판을 중지하자는 법안도 제출됐다. 60년 10월 서울지법 장준택판사는 6대 사건 관련자들에게 「공소시효완료」 또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또는 가벼운 형을 선고했다.
이 판결은 즉각 「혁명 정신을 배반했다」는 거센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후일 여론을 업은 권력의 외압에 맞서 소신을 굽히지 않은 「사법사상 가장 용기있는 판결」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5·16직후 구속되는 곤욕을 치른 장준택판사는 『위정자가 법을 지키지 않아 4·19가 일어났는데 법관마저 법을 제쳐둔 채 감정대로 판결할 수는 없었다』고 회고했다.
79년 10월 26일 유신체제에 종지부를 찍은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은 권력 공백기의 혼돈속에 법원에 깊은 고뇌를 안겼다. 군법회의에서 단순가담자를 제외한 전원에게 사형이 선고된 이 사건의 상고심을 맡은 대법원은 「서울의 봄」이 비상계엄확대와 광주민주화운동등으로 시들고 있던 80년 5월20일 전원합의체 판결로 김재규피고인등 5명의 사형을 확정했다. 김재규의 대통령 시해를 「의거」로 규정한 변호인들의 주장은 역사적 판단에 맡겨졌다. 그러나 대법관 14명중 6명은 「김재규등을 내란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등의 소수의견을 남기는 용기를 보였다.
민문기 대법원판사는 『박대통령 궐위후 새 헌법을 만들자는 것이 국민적 합의로서 시국을 지배하는 구속력이 있으므로 범행때와 재판때의 기반이 달라 내란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밝혔다. 양병호대법원판사는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해서 곧 정부를 전복하려는 국헌문란의 목적으로 살해한 것으로 보는 것은 지극히 소박하고 단순한 사고』라고 다수의견을 반박했다.
임항준 김윤행 대법원판사는 『피고인들과 같이 6∼7명에 불과한 사람이 대통령을 저격한 경우 내란죄에 규정된 폭동을 할만한 다수인의 결합이 없어 내란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견이었다.
당시 소수의견은 물론 판결문 자체가 계엄당국의 압력으로 공개되지 못했다. 3개월뒤 민문기대법원판사등 5명은 의원면직됐고, 정태원대법원판사도 81년 4월 재임명에서 탈락했다. 「금기문서」였던 10·26사건 판결문은 90년 6월 「대법원합의체 판결집」에 실려 10년만에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이 판결직전 사회혼란 조성및 시위 배후조종혐의로 연행된 김대중 문익환등 11명의 내란음모사건은 전두환정권이 들어서고 대법원판사들이 대폭 갈린 81년1월23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피고인들의 상고를 모두 기각,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가 선고한 김대중 사형등의 형이 그대로 확정됐다. 이 사건 판결문도 당시 공개되지 않았다.
지난해 전두환전대통령등 12·12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검찰의 기소유예처분을 둘러싸고 논란이 치열했으나 헌법재판소는 합헌결정을 했다. 현재 검찰이
수사중인 「5·18」사건도 비슷한 결론이 내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 사건들이 법정에 올려졌다면 문민시대 사법부가 어떤 판단을 내렸을지 궁금하다.<이희효 기자>이희효>
◎대법원장의 말… 말…/법관은 사법독립위해 질수 없는 책임도 져야초대 김병로씨/사법권의 존재양식도 헌법에 발맞춰야 한다73년 민복기씨/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법관상을 정립해야93년 윤씨
「사법부 수장」으로 지칭되는 대법원장의 발언에는 당대 사법부의 역사인식과 법원이 처한 시대상황이 반영돼 있다. 역대 대법원장의 어록을 통해 법원의 지난날을 돌아본다.
『봉급으로 생활할 수 없는 형편상 많은 법관들이 자리를 떠나고 있지만 법관은 사법권 독립을 위해 책임이 크고, 질 수 없는 책임이라도 져야 한다』(57년 김병로 초대대법원장)
『국군의 장거를 국민과 더불어 높이 찬양하고 사법부도 혁명정신에 입각, 부하된 사명을 완수할 결의를 다지자』(61년 5월 배정현 대법원장직무대행)
『나라의 통일과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의 구조가 가장 집중적·효율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유신헌법의 본질인 이상 사법권의 존재양식 또한 이에 발맞춰야 함은 당연한 귀결이다』(민복기5·6대 대법원장 73년 신년사)
『취임초에는 포부와 이상도 컸으나 과거를 돌아보면 모든 것이 회한과 오욕으로 얼룩진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됐다』(81년 4월 이영섭 7대 대법원장 퇴임사)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행복을 자손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는 국가안보의식을 고취해야 한다. 법도 국가가 있은 연후의 것이므로 법을 적용함에 항상 국가존망을 의식해야 한다』(81년 4월 유태흥 8대 대법원장 취임사)
『사법부의 신뢰회복을 원하는 소장법관들의 뜻이 집단행동으로 표현된 것이 법관으로서 과연 바람직한가를 떠나 사법부의 올바른 위상을 정립하기 위한 충정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88년 6월 김용철 9대 대법원장 퇴임사)
『사법권 독립은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만이 아니라 어떤 집단으로부터도 독립됨을 뜻한다. 공권력의 권위훼손에 편승해 재판절차를 방해하는등 법정소란을 일으키고 재판결과를 무시하는 행위를 용납해서는 안된다』(90년 12월 김덕주 11대 대법원장 취임사)
『변화와 개혁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기를 주저한다면 국민은 사법부를 외면하고 말 것이다. 국민의 편에서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법관상을 정립해야 한다』(93년 9월 윤(윤관) 12대 대법원장 취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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