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한국형 경수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데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모처럼 모아진 초당파적 정신은 앞으로도 외교안보통일에 관해서는 계속 유지돼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추구하는 비핵화와 평화, 남북대화와 통일을 성취하는데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고 이에 필요한 국내및 대미일결속을 지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수로제공에 대하여 우리가 한국형과 중심역할을 강조하는 분명한 이유는 한반도에서 비핵화, 평화장치 및 남북대화를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중시하는 것은 상표나 자존심보다도 한국형 경수로를 설계, 건설및 시공함으로써 남북간에 직접적인 대화와 협력의 물꼬를 트자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한국형을 수용하느냐 여부는 한국과 영구적 평화와 화해를 직접 협상할 것인지 아니면 한국을 제쳐놓고 계속 미국과 평화협정협상을 시도할 것인지를 판가름하는 신호로 볼 수밖에 없다.
미국도 언필칭 남북대화없이는 제네바 합의이행은 불가능하다고 말해왔다. 이 말은 북한이 남북관계를 정상화하지 않는한 미국도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미국 자신에 대한 위협이 소멸한 세계에서 클린턴행정부는 지구적 핵확산금지를 최우선시하고 그 다음에 지역안정, 그리고 국지분쟁해결을 고려하는 외교정책 우선순위를 나타내어 제네바핵합의를 성급하게 타결했던 것이다. 한편 한국은 북한핵무기 방지라는 국지전략을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고 그 다음에 동북아지역안정, 그리고 지구적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냉전기에는 이 두 시각간에 큰 간격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 격차가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미국의 외교정책을 당연시하거나 그대로 따를 수만은 없는 것이다.
자기들에게 사활적인 위협이 사라진 세계에서 강대국들의 외교정책은 국내정치동향에 의하여 좌우되고 있다. 다행히 미국에서는 공화당이 40년만에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장악하여 한반도내에서 남북대화와 신뢰구축의 중요성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미국방부도 동북아에 전진배치하고 있는 10만 병력을 현수준대로 유지하겠다는 「동아전략보고」를 최근에 발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린턴은 내년선거에서 북한핵문제가 자기의 재선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이러한 여건에서 작년에 일괄타결을 옹호했던 세력들이 미국회사가 경수로공급의 주계약자가 되고 한국전력공사는 하청업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또 다시 한국측에 타협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국내정치구도가 대외정책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3월말에 와타나베 전외상이 연립여당대표를 이끌고 평양에 가서 북한과 무조건 수교협상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이것은 그들이 불투명한 국내 정국에서 새로운 인기영역을 확보하기 위해서 편의적으로 취한 조치였다. 경수로협상이 진행중인 미묘한 시점에, 그것도 한국측과 「폭넓은 사전협의」를 하기로 했던 종전의 약속까지 어기고 집권당이 방북을 진행했던 점을 우리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에서도 덩샤오핑(등소평)의 사망이 임박함에 따라 경제논리와 정치논리가 대결하고 있는 것이 그 외교정책에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 작년 10월에 리펑(이붕)총리가 방문했고 현재 차오스(교석) 전인대(전인대) 상무위원장이 서울에 온 것은 한국과 주로 경제협력을 촉진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붕이 서울에 머무는 동안 베이징(북경)당국은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중국대표를 철수시켰고 그 뒤에도 KEDO에 참가를 거부했으며 북한이 정전협정에 대치할 평화협정을 미국과 협상할 것을 요구하자 이를 지지했다. 장쩌민(강택민)이 이끄는 현집단지도층은 정치적으로 미국을 불신하면서 말로는 남북대화와 제네바핵합의이행을 지지한다면서도 북한정권에 대한 영향력행사를 꺼리고 있다.
이와 같이 강대국들의 지도층은 단기적인 국내정치시각에서 외교정책을 정의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될 것이다. 한국은 오히려 미일중이 그처럼 국내우선 외교정책을 표출하고 있는데 효과적으로 적응하여 미일의 정부는 물론 의회, 언론및 일반국민들이 우리 입장을 이해하고 지지하도록 만드는데 모든 힘을 규합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들의 핵무기없는 한반도와 평화를 한사코 지키겠다는 결의를 확고하게 하고 끝까지 버텨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강대국들이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대외여건과 함께, 우리의 국내여건도 대외정책의 비정치화를 요구하고 있다. 현재 정당분포가 다시 분열하고 있고 서울시장과 기타 지방단체장의 선거전이 가열되고 있으며 앞으로 매년 치러야 할 선거를 통하여 정치인들은 지지를 얻으려고 외교안보통일문제를 또다시 정치화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그렇게 되면 국론은 분산될 것이며 외부세력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자기이익을 챙기려고 할 것이다.
안보의 비정치화라 함은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고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정책목적에는 결속하면서 비판과 지지를 건설적으로, 그리고 초당파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연세대 교수·국제정치학>연세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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