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장규모·기술 세계수준 경쟁력/영화·가요·만화 등 “일방잠식” 우려 한·일 대중문화는 내용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지역적으로 가까워서 정서적 바탕이 유사한데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영향을 주고 받았기 때문이다. 50대 이후의 장·노년층에서 일종의 향수를 느끼는 이유도 그런데 있다.
만화를 제외하고는 아직 세계시장에 진출하지 못하고 내수용에 그치고 있는 점도 같다. 50년대 황금기를 구가하던 일본영화는 이제 국내시장의 40%를 지키는데도 급급하며 비디오는 야쿠자영화와 AV(성인용 포르노영화)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가요 역시 미국 팝스타들에 상당부분 시장을 내준 상태. 미국의 독주에 속수무책으로 위축되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대중문화산업의 규모에서는 양국이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일본의 소니가 미국 할리우드의 컬럼비아를 소유하고 있는데서도 읽을 수 있듯이 일본의 영상산업은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음반산업도 국내수요에 연연하는 우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무엇보다 만화영화산업은 월트디즈니사가 버티고 있는 할리우드를 전체 매출에서 55%대 45%로 앞서고 있다.
한·일 대중문화개방이 단계적으로 산업적인 측면으로 확대될 경우 우리 대중문화산업은 일본에 종속되거나 하청산업화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때문에 대중문화개방이 세계적인 추세이며 개방을 통해 우리의 경쟁력을 기를 수 있다는 긍정적 계산하에 개방을 허용한다 해도, 상당 기간 문화교류적 차원에서 적절히 차단하고 견제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대중문화산업이 이미 상당 부분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상태이다. 일본의 소니사가 실질적인 소유주인 컬럼비아 트라이스타가 미국영화를 직접 배급하고 있으며, 소니뮤직은 외국음악의 음반을 제작·판매뿐 아니라 이무송 노사연등 국내가수들의 음반도 직접 제작해 판매하고 있다.
일본만화 수입에는 「일본색이 없는 청소년물에 한한다」는 단서가 따라붙기는 하지만, 우리 청소년은 일본출판만화와 TV영화 앞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일본의 영화산업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1950년대를 정점으로 쇠퇴하고 있다. 50년 연간 관객이 11억3천여만명에 국민 일인당 연간 관람횟수가 12.1회에 이르렀으나, 92년 현재 연간 입장객은 1억2천5백여만명으로 줄었고 영화관도 7천4백57개(50년)에서 1천7백44개로 전성기에 비해 7분의 1로 감소됐다.
그러나 일본영화계는 쇼치쿠(송죽) 도호(동보) 도에이(동영) 등 연간 매출액이 2백억∼5백억엔에 이르는 3대 메이저사가 제작과 배급을 장악, 외화의 공격속에도 안정을 유지하며 45.1%의 시장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일본영화는 장르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선정적이고 잔인하며 봉건윤리적인 신분관을 바탕에 깔고 있어 우리가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 많다.
영화계는 일본의 상업영화가 수입될 경우 상당기간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해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국문화정책개발원이 지난해 조사한데서도 볼 수 있듯이 일본영화를 본 후 「별 느낌이 없다」는 반응이 대부분(43%)이어서 크게 우려할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음반부문에는 일본가요가 개방될 경우 전체음반시장의 10%정도를 일본음악에 빼앗길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일본유흥업소에서 사용하는 음악의 30% 정도가 한국음악일 만큼 일본인들도 한국음악을 좋아하고 있다.
일본의 대중음악이 우리와 정서적인 공감대가 큰 반면 편곡과 녹음등 기술적인 면에서 앞서 있으므로, 젊은층을 중심으로 일본음악에 경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김경희 기자>김경희>
◎동남아 일 문화식민지화 실태/50∼60년대 국교정상화후 꾸준한 문화침투/위성방송 무차별 월경 이미 「대동아문화권」
「아시아를 하나로」. NHK TV와 홍콩의 스타TV가 하루종일 동남아 전역으로 프로그램을 쏘아 올리면서 일본에서 히트한 대중가요나 드라마가 거의 동시에 동남아에서도 인기를 모으곤 한다. 일본은 이제 국경을 뛰어 넘는 전파매체를 통해 「대동아문화권」을 만들어가고 있다.
일본대중문화에 대해 특별한 규제조치를 취하는 동남아국가는 없다. 국가안보나 미풍양속에 저해되는 내용은 심사를 통해 걸러내고 있으나 심사 자체가 거의 드물어 사실상 「전면개방」이라고 볼 수 있다. 대만과 홍콩등은 저녁 황금시간대에 일본 오락물을 고정적으로 방영하고 있는데 가요의 인기가 특히 높다. 국내에서도 영화로 제작됐던 후지TV 드라마 「백한번째의 프로포즈」의 주제곡 「SAY YES」로 유명한 남성 듀엣 「차게 앤드 아스카」는 지난해 홍콩 싱가포르 순회공연에서 전좌석이 매진되는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동남아국가에 대한 일본의 문화수출은 50∼60년대 국교정상화를 추진하면서 시작됐다. 이어 고도성장을 이룩한 70년대에는 적극적 문화외교를 펼쳤다.
일본문화수출은 일본적 가치관을 퍼뜨리고 문화상품의 판매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곧 문화침투였다. 인기있는 일본영화도 대부분 일본적 가치관을 대표하는 「충성심, 희생, 인내」등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일본음악이 인기를 끌면 반드시 일본음반업계가 침투하곤 했다. 70년대에 설립된 「일본재단」과 「아세안문화기금」은 이같은 일본문화침투의 첨병이다.
「일본문화를 해외에 소개하는 단체나 개인을 후원하는 것」이 설립목적이지만 실제로는 세계 각국의 중요 언론인, 문화인, 지식인, 전직 정치인들을 일본으로 초청, 각종 행사나 공연에 참석시켜 지일인사로 만들고 있다.
특히 90년대 들어 소련의 몰락등으로 국제정세가 급변하자 일본은 「범아시아문화권」을 내세워 각종 문화행사나 공연을 활발히 개최, 동남아전역에서 일본문화권을 정착시켜가고 있다.<박천호 기자>박천호>
◎어떤 대응전략 필요한가/이원홍 전문화공보부장관/「저질 걸러내기」가 관건/철저한 감시장치 필요
일본대중문화의 본질은 에로티시즘이다. 문화는 그 민족의 전통과 역사를 바탕으로 한다. 민족의 성품과 관습이 그 본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는 고급문화의 대립개념이다. 엘리트층의 위세와 권위를 만족시키는 고급문화에 반대되는 서민대중의 일상생활인 평민문화를 말한다. 일본대중문화는 전통적인 에로티시즘을 모태로 한다. 유곽과 창녀, 혼욕과 성교, 인신매매와 축첩, 복식과 침소, 춘화와 외설, 가무와 연극, 성기숭배와 음란무속, 강담과 변태, 심지어 고대역사의 기록에 이르기까지 진한 에로티시즘이 깔려 있다. 그것이 오늘의 영화와 가요, 만화와 소설을 휩쓸고 있다.
세계는 지금 탕객의 대중문화시대이다. 미국영화에서 상소리를 빼면 대사가 없어질 정도가 되었다. 유럽영화도 알몸의 베드신을 빼면 스토리가 단절될 정도다. 『꼭 껴안아 애무해줘』라는 열애의 가사가 없으면 일본의 유행가가 성립되기 어렵게 되었다. 대중문화는 탕객의 노리개로 타락하고 있다.
이 물결이 삼면에서 인간을 포위한다. 첫째는 미디어를 통한 연예로, 둘째는 무대의 실연을 통한 공연으로, 셋째는 가라오케처럼 일상생활을 통한 오락으로 포위한다. 이것은 다시 거대한 경제의 흐름과 결합하여 국경을 파괴한다. 경제는 문화라는 세를 얻었다. 문화정책과 문화계획, 문화와 경제의 동태를 연구하는 문화경제학이 체계화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문화동태에 비하면 일본 대중문화개방 여부에 대한 우리의 대응이 너무 관념적이고 사변적이다.
일본대중문화의 개방에는 대중문화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따라야 한다. 일본대중문화에는 폭력과 마약등 범죄적 에피소드도 따르게 마련이다. 특히 영화와 만화등 영상미디어의 세계적 경향이 그렇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거기에 대응하는 길은 기존의 공연윤리위원회와 간행물윤리위원회와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법률적인 위상을 강화하여 일상업무를 충실히 수행토록 조치하면 그만이다. 우리는 일본이나 다른 외국에 비해 청소년 보호와 풍속사범 단속이 너무 허술하다.
미국은 포르노를 해금하면서 외설과 포르노에 관한 위원회를 설치하여 면밀한 사전대책과 조사연구를 추진했다. 레이건대통령도 집권초에 연방검사들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섹스와 마약단속에 나섰다. 미국은 업자들이 불법으로 취득한 소득을 전액 국고에 환수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논쟁이나 아이디어경쟁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기구의 임무수행능력을 높이는 것이다.
미국적 일본영화의 상영을 허용하는 규정을 그대로 둔채 심의기관의 책임자를 해임하여 언론의 공격화살을 피한 정부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몇년째 허덕이고 있는 일본만화문제에 손을 놓고 있는 정부에 무엇을 기대하자는 것인가. 개방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문화동태의 세계적 추세를 이해하고 장기적 대응책의 수립과 정부 내부의 능력조정을 선행하여야 한다.
또한 우리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우려가 있다. 반일이데올로기가 대중문화 반대의 연결고리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시간은 우리의 해결사가 아니다. 시간은 우리의 족쇄이다. 일본대중문화의 개방문제는 적어도 문화적 동태의 일환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처지는 어렵게 된다. 문화에 지나친 정치적 타산의 올가미를 씌우지 말아야 한다. 문화는 문화적 처방으로 풀어야 한다. 개화기의 일본만화 산파역이 영국인 찰스 와그맨과 프랑스인 조르주 비고였다. 홍콩영화의 오늘을 구축한 사람이 중국이름으로 명성을 떨쳤던 일본인감독과 카메라맨이었다. 문화의 이전에는 기술뿐 아니라 사고와 사상이 따라야 한다. 한국의 영화와 만화는 시간과 싸워야 한다. 지금 우리의 사고를 전환하는 것이 대중문화전략의 핵심이다.
◇약력
▲경남 고성출신·66세 ▲서울대 종교학과 ▲한국일보 정치·사회부장, 주일특파원, 편집국장 ▲대통령 민원수석비서관 ▲한국방송공사사장 ▲문화공보부장관 ▲간행물윤리위원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