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로 말해온 법치·인권의 보루/71년 국가배상법 위헌 “사법부 무혈혁명”/82년 김시훈무죄 피의자 인권보호 큰획/작년 생수판금 위헌 행복추구권 구체화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는 고전적 법언은 여러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법원이 정치권력의 핍박으로 고뇌하던 오랜 권위주의 통치하에서도 법관들은 이 화두를 놓지 않았고, 법치주의의 수호자로서 사법부가 살아 있음을 알리는 판결들을 내놓았다. 최근 법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법관들은 「근대사법사상 가장 의미있는 판결」로 ▲71년 국가배상법 위헌판결 ▲82년 「김시훈사건」무죄판결 ▲94년 생수시판금지 위헌판결등을 꼽았다. 67년 3월 제정된 국가배상법은 애초부터 위헌 요소를 갖고 있었다. 이 법은 일반 국민과 달리 군인 군속은 직무수행중 사고로 순직하더라도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규정, 전국법원에서 위헌판결이 잇따랐다.
월남참전용사들의 손해배상청구가 쏟아질 것을 우려한 정부는 사법부에 위헌판결을 「자제」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위헌판결이 계속되자 정부는 법원조직법의 위헌심판 규정을 개정, 법원의 위헌심사권을 제한하고 나섰다.
사법부와 정부가 첨예하게 맞선 상황에서 71년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개정된 법원조직법은 위헌이라는 판결과 함께 국가배상법의 문제조항에 대해서도 위헌결정을 했다. 법원사는 이를 『3공이후 처음으로 위헌심사권을 적극 행사, 사법부 스스로 사법권의 우위를 내세운 헌정사상 가장 획기적인 판결』이라고 기술했다. 당시 언론들도 사설등을 통해 「사법부의 조용한 혁명」 「사법부의 독립 천명」등으로 높이 평가했다.
82년 9월의 「김시훈사건」무죄판결은 수사기관의 고문등 불법적 수사관행에 제동을 걸고 피의자 인권보호에 큰 획을 그은 귀중한 판결로 꼽힌다. 공사장 인부였던 김씨는 살인사건 용의자로 몰려 경찰의 고문과 협박에 못이겨 범행을 자백했다가 법원에서 고문사실을 폭로하고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했으나 하급심에서 징역 15년이 선고됐다.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진술서 작성의 임의성, 진술내용의 진실성여부를 불문하고 피고인이 법정에서 진술서 내용을 부인하는 한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 범죄인의 처벌보다 억울한 죄인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선언했다.
같은해 2월 「윤노파살해사건」의 고숙종피고인에 대한 서울형사지법의 무죄판결과 7월 「여대생 박상은양 살해사건」의 정재파피고인에 대한 서울지법 동부지원의 무죄판결등도 수사기관의 강압적 수사관행에 경종을 울리고 「증거 제일주의」원칙을 확인한 획기적 판결로 평가된다.
지난해 대법원 특별2부가 『생수의 국내시판을 불허한 보사부 고시는 헌법에 보장된 직업선택의 자유와 행복추구권및 환경권을 침해한 위헌』이라고 판결한 것도 법원이 국민의 입장에서 오랜 행정편의주의를 통렬히 꾸짖은 판결이다.
법원은 보사부가 수돗물에 대한 국민의 불신 해소를 생수시판 금지조치의 근거로 내세운데 대해 『국민이 수돗물을 마시기 꺼려 한다면 정부는 먼저 수돗물의 질을 개선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이례적으로 행정부가 가져야할 자세까지 제시했다. 이 판결은 헌법 조문상의 추상적 권리로만 인식되던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실생활과 밀접히 관련된 구체적 권리로 인정한 점에서 시대의 변화에 법원이 적극 부응한 판결로 평가된다. 이는 「국민에 봉사하는 사법」을 표방한 문민시대 사법부의 개혁의지가 담긴 판결로 법원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이희창 기자>이희창>
◎법조인의 사표/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청렴·강직 사법권 수호 앞장/이승만대통령 「무도」 통박도
우리의 법원사에는 법원 안팎의 현실이 어지러울 수록 영원한 사표로 새삼 기억되는 이들이 기록돼 있다.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는 그중에서도 우뚝한 거목이다. 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사법부 수장이 된 그는 9년 4개월간 강직한 성품과 지사적 기개로 사법부의 독립과 권위를 올곧게 지킨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1877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27세때 을사보호보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던 그는 일본 메이지(명치)대를 나와 항일변호사로 활동하다 해방후 미군정 사법부장을 거쳐 초대 대법원장에 올랐다. 일제때 나라없이 방황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가인이란 호를 손수 짓고, 해방후에도 나라가 분단되자 가인신세에 변함이 없다며 호를 바꾸지 않았던 그를 독재자 이승만대통령은 「헌법」이라는 별명으로 지칭했으나 그의 소신을 꺾지는 못했다.
56년 2월 법원이 안호상 초대 문교장관의 국가보안법위반사건등 사회의 이목을 모은 사건들에 잇달아 무죄를 선고하자 이대통령은 국회 개회식 치사에서 『우리나라 법관들은 세계에 없는 권리를 행사하고 있으나 다행히 대법원장이 그 폐단을 양해해 중대한 문제는 정부와 협의, 판결하는 까닭으로 큰 위험은 없다』고 사법부 독립을 짓밟는 「망발」을 했다. 이에 김병로대법원장은 『오늘날까지 재판이나 사법운영에서 소신과 양심에 어그러진 판단을 한 일은 한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을 단언한다』고 대통령의 무도함을 통박하는 기개를 보였다.
가인의 면모는 한복 두루마기 차림에 운동화를 고집하고 토막난 도장을 10여년 사용한 청렴한 생활과 경호 경찰관들이 따르는 것이 부담스럽다며 6·25때 숨진 부인의 묘소를 재직중 한번도 찾지 않는 고결함에서 한층 돋보인다. 그는 57년 야인이 된 뒤에도 자유당이 법관회의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임명할 수 있도록 법원조직법을 개정하려하자 『주인에게 묻지도 않고 머슴이 혼자 결정을 내리는 것처럼 방자한 일』이라고 비판하는등 사법권 수호에 앞장서다 64년 1월 7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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