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근대사법 출범/해방이후 「독립」의지 불태워/60∼70년대 암흑기 거쳐/90년대 새출발·개혁 진통 1895년 4월25일 「재판소 구성법」시행으로 근대적 사법제도가 도입된지 1백년을 헤아리게 됐다. 「근대사법 1백주년」을 맞아 사법부를 비롯한 법조·법학계는 영욕과 파란으로 점철된 한세기의 발자취를 되돌아 보고 앞날을 설계하는데 분주하다. 사법제도의 중추인 우리 법원이 걸어 온 굴곡많은 행적과 여기에 투영된 시대상의 변화등을 몇차례에 나눠 정리한다.【편집자주】
한말 국권이 기울던 상황에서 시작된 「법원 1백년」의 역사는 격동과 파란으로 이어진 민족사의 궤적을 시초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국법질서의 수호자인 법원은 역사의 굴곡과 변전(변전)의 고비마다 누구보다 고통스런 변혁을 겪으며 고뇌의 몸짓을 거듭해 왔다. 이 「숙명」은 1백년의 연륜이 쌓인 지금도 굴레로 남아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가볍지 않게 하고 있다.
근대사법제도의 태동 또한 근대화의 여명인 1894년 갑오개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해 7월 「모든 죄인은 사법관에 의하지 않고는 형벌을 과할 수 없다」는 재판과 행정의 분리원칙이 법령으로 선언됐다. 이어 1895년 4월25일 「재판소 구성법」의 시행으로 각급 재판소가 설치됐다.
그러나 곧이어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사법제도는 일제 식민통치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동시에 일본의 현대적 사법제도가 그대로 이식돼 법치주의의 외형을 갖추는 「발전」을 이뤘다. 식민통치를 위한 악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법률과 제도의 기본틀이 광복이후에까지 유지됐다.
48년 7월17일 독립국가의 민주헌법 공포와 함께 법원도 비로소 온전한 「민주사법」으로 새로이 출발했다. 이후 자유당 통치시대를 일관해 이 땅의 낯선 민주주의가 진통을 거듭했듯이 법원도 이념 대립과 정치권력과의 갈등속에 파란을 겪었다. 국가보안법위반사건과 정치적 사건에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자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법원을 비난하는가 하면 정권의 사주를 받은 시위대가 법원청사와 판사집에 난입하는 「원시적」사건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투쟁의 시기에 「소신판결」「소신법관」이 잇달았고, 역설적으로 사법부의 독립의지가 어느 때보다 돋보인 시대로 법원사는 기록하고 있다.
5·16을 거쳐 10월 유신, 10·26 사건으로 이어진 60∼70년대는 사법부에도 암흑기였다. 「대법관」명칭이 「대법원판사」로 격하됐고, 모든 법관의 임명권은 물론 보직권까지 대통령이 장악했다. 숱한 법관들이 타의로 법복을 벗어야 했고 급기야 현역대령을 법원행정처장으로 맞는 치욕을 겪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71년 대법원은 정부의 뜻을 제치고 국가배상법 위헌판결을 내놓아 소신을 과시했다. 정부가 법관 구속으로 보복에 나서자 전국법관들이 일제히 사표를 제출하는 「사법파동」으로 사법부의 독립과 권위를 지키려는 의지를 보였다.
80년이후 권위주의 정부와 민주화 투쟁이 격돌하는 상황에서 사법부는 독립을 이루지 못한채 국민들의 신뢰마저 잃는 시련속에서 고뇌를 거듭했다. 25년만에 대법관 명칭이 부활되는등 숨통을 트는듯 했으나 소장법관들의 개혁요구로 대법원장이 조기퇴진하는 진통을 겪었다.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법원은 새로운 출발을 요구받고, 이에 부응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사법개혁 논란에서 드러나듯 진정한 「민주사법」의 구현을 위해서는 법원 안팎이 모두 의식과 행동의 일대 혁명을 이뤄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이희창 기자>이희창>
□근대사법 100년 연표
1894 12월 갑오개혁.「홍범14조」반포
1895 4월 재판소구성법 시행근대사법 출범
5월 한성재판소 설치(종각 제일은행 본점자리)
11월 법원양성소 1회 졸업생 48명 배출
1909 7월 일본정부에 사법권 위탁
1910 10월 한일합방,조선총독부 재판소설치
45 11월 해방,미군정 재판소 설치
46 7월 조선정판사 위좆폐사건 재판
48 7월 대한민국 헌법 공포
8월 김병노 초대대법원장 취임
49 9월 법원조직법 공포
50 3월 국회프락치사건 판결국회의원 13명에 유죄선고
58 6월 노용순대법원장 취임(2대)
7∼8월 진보당사건 조봉석씨 국가보안법위반 무죄선고. 시위대 법원난입,2심서 사형선소59년 2월 확 정
60 5월 4·19혁명 여파 조대버부언장 사퇴
61 6월 국가재건비상조치법 공포
7월 조진만대법원장 취임(3·4대)
64 5월 한일회담 반대시위자 영작기각되자 군인들 법원·판 사집 난입
68 7월 대법원,동백림사건 관련자일부 무죄취지로 파기
10월 민복기대법원장 취임(5·6대)
71 6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국가배상법 2조1항 위헌판결
7∼8월 사법파동
72 10월 유신헌법 공포
79 3월 이영섭대법원장 취임(7대)
5월 서울민사지법,김영삼신민당총재 직무집행가처분신청 인용
80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10·26사건 김재규 사형확정 판결
81 4월 유태흥대법원장 취임(8대)
85 7월 미문화원농성사건 법종소란으로 김양휘 법무장관 경질
10월 신민당,대법원장 탄핵소추안 발의국회서 부결
86 3월 김용철대법원장 취임(9대)
87 9월 25년만에 「대법관」명칭 부활
88 1월 대법원,부천 성고문사건 문귀동에 대한 검찰의 기 소유예처분에 관한 재정신청 기각한 원심결정 파기 6월 재경법관 50여명,대법원 면모일신 촉구 성명서 발표
7월 김대법원장 사퇴,이일규대법원장 취임(10대)
89 9월 서울고법,민·형사지법,가정법원 서초동청사 이전
90 12월 김덕주대법원장 취임(11대)
93 9월 윤관대법원장 취임(12대)
94 7월 법원조직법등 사법개혁안 국회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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