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전쯤의 일이다. 1988년 늦가을, 미국에서 처음 북한방문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어렵게 수속을 마치고 평양에 갔다. 5박6일동안 취재를 하면서 안내원의 눈총을 받아가며 사진을 찍고 후계자문제, 종교의 자유등 수없는 질문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긴장속에 보낸 1주일중 가장 인상에 남았던 한순간은 평양에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한국일보 미주본사와 직접 통화를 했던 것이었다. 새벽녘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교환을 통해 국제전화를 신청했더니 5분여가 지나 북경을 거쳐 정말 미국이 나왔다.
『평양에 잘 도착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첫눈이 내렸고 밖은 영하 7∼8도로 조금 추운 편입니다. 내일은 시내관광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동토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는 회사동료들이 환호를 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미국과 북한간의 편지왕래 길은 오래전부터 열려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북한으로는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 단지 걸려오는 전화만을 받을 수 있었다. 미국이 북한을 적대국으로 규정해 경제적 제재조처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많은 미주교포들은 미국과 북한 사이에 국제전화의 길을 열어달라고 백악관과 국무부등 요로에 여러 차례 청원을 했다. 하지만 지난 4월10일 미국이 드디어 평양과의 전화선을 연결했다.
이날 로스앤젤레스·뉴욕등에서는 앞을 다투어 평양으로 전화를 걸었다. 미국과 북한의 통화량은 갈수록 늘어날 것이 틀림없다.
베를린에서 열렸던 미·북경수로회담은 아직도 전망이 불투명하다. 한반도에 또다시 긴장이 찾아올까 우려하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카터 전미국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는한 어떠한 현안문제의 해결도 어렵다』면서 중재역을 다짐하고 나섰다.
지난 13일 LA한인회(회장 장성길)는 프레스센터에서 「세계화에 해외교포의 역할」이라는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주제발표를 한 유의영교수(칼스테이트LA·사회학)는 『세계화와 통일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가는 것』이라면서 『5백만 해외동포가 통일분위기 조성에 나설 때』라고 강조했다. 토론에 나선 백영옥박사(명지대·북한학과)는 『남북한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해외교포들』이라면서 『통일의 중매자로서, 통일정책에 영향을 주는 일을 해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해외교포가 남북문제 해결에 작은 몫을 맡을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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