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들 무렵의 일이다. 미술시간에 석고데생을 하던 친구 하나가 지우고 또 지우고 하더니 결국은 스케치북을 부욱 찢었다. 나는 보이는대로 편안히 그리고 있는데 친구는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 그 친구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불쑥 『그려줄까』라고 물으니 친구의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나는 어렵지 않게 그려주었다. 그 후에도 주변사람들을 도와주면서 그들이 그림그리기를 고통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왜 나는 그들과 다른가? 나이 오십에 이르러서야 그들과 나의 차이점을 찾아내게 됐다. 내가 그림그리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덕택이다. 처음으로 그림을 그렸던 것은 다섯살때로 기억된다. 전쟁중 피란지인 마산에서 나는 얕으막한 산등성이에 올라 아버지옆에서 그림을 그렸다. 아래로 보이는 피란민촌의 천막집들을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산으로 묘사했다. 그렇게 말없이 상상화를 그리는 동안 아버지는 그냥 바라보고만 계셨다.
조금 더 자라서는 집에 손님이 오면 아버지는 나를 불러 그들의 모습을 그리게 했다. 내가 몰두해서 그림을 그리고 나면 아버지는 『똑 같지. 사진이야』라며 나를 칭찬했다. 아버지는 혼자서 나를 칭찬해대는 것도 모자라서 모든 손님들로부터 칭찬을 받아냈다. 그때는 그말을 무심히 흘려 들었다. 귀찮다는 생각도 했지만 돌이켜보니 그러한 말들이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를 만들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미술대회에 나간 적도 없고 상을 타본 적도 없다. 그런데도 그림그리는 일을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어떤 그림은 완성하기까지 3년이 걸리기도 했지만 안타까웠을 뿐 고통받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칭찬이 그림그리기를 자연스럽고 편안한 작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끊임없는 칭찬의 말들이 어른이 돼서도 세상속에서 어지간한 일에는 끄떡도 하지 않게 하는 기초가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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