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영화 「태양에 타버린 사람들」이 지난달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에서 외국영화부문의 수상작으로 뽑혔다. 니키타 미할코프(50)감독의 이 영화는 1936년 소련 독재자 스탈린에 의해 파멸로 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는 러시아전역에서 볼 수 있는 영화 포스터만으로 러시아인들에게 암울했던 과거를 되새겨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 영화계는 이미 4차례나 아카데미 최우수외국영화상을 따낸 저력을 갖고 있다. 영화의 역사, 기술, 연기력, 연출력등에서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다. 냉전종식이후 러시아가 초강대국의 대열에서는 떨어졌지만 영화부문과 같이 아직도 세계적 수준에 올라있는 분야가 적지않다.
그럼에도 90년 수교 이후 떼지어 몰려왔던 한국 유학생수가 최근 조금씩 줄어가고 있다. 공부가 끝나 귀국하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실력이 모자라 중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세계최고수준을 자랑하는 모스크바국립음악원(차이코프스키 콘세르바토리)의 경우 실력이 모자라면 유학생이라도 가차없이 잘라낸다. 일부 한국 유학생들은 할 수 없이 학교를 옮기거나 중도에 귀국보따리를 싸야만 했다.
모스크바 주재 외교관이나 상사원들은 요즘 신바람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그 이유는 서울에서 모스크바에 너무 무관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소수교 이후 북방외교의 열기를 타고 러시아에 진출하려던 각 기업들이 현재 꼬리를 빼고 있고 그저 보따리장사들만 한탕하려고 찾아든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러시아열기가 사라져 버린 까닭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러시아 자체에서도 중요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비행기를 타고 러시아 관문인 모스크바 세레메체보 공항에 내린 사람이면 어떻게 국제공항이 이 모양이냐는 푸념을 절로 하게 된다. 한마디로 「시골장터」같이 뒤죽박죽인 공항상황은 러시아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1주일정도 지내다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고 「제대로 된게 하나도 없다」는 말만 하게 된다.
실제로 러시아는 편리함에 익숙한 한국인들이 지내기 불편한 곳이다. 지난 70여년간 관습으로 굳어진 체제가 거의 변하지 않았고 또 하루아침에 변할 수도 없다. 다만 시장경제체제도입이후 피부에 와닿는 생활방식은 많이 바꿨다. 그렇더라도 아직은 변화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보리스 옐친대통령등 현집권세력이 의도한 대로 정치·사회·경제등 국가전반을 운영해나가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집권세력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형편이라는게 적절한 표현인 듯하다.
그러나 러시아측은 한국기업의 「냄비」성향에 더 섭섭해한다. 러시아는 당초 극동지역에서 경쟁상대인 중국이나 일본보다 한국과의 협력을 희망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눈치다. 언론에서도 한국관련기사가 대폭 줄어들었다.
모스크바의 한 외교관은 『현대의 정주영 명예회장이 92년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지 않고 시베리아에 투자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는 『러시아의 어려운 상황만을 보고 잠재력을 외면하다면 한국은 큰코 다칠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의 지적은 세계화 구호를 외치면서 미국이나 일본만을 보는 우리의 현실을 꼬집는 것으로 해석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러고보니 한반도 주변 4강의 표기순서가 「미·소·중·일」에서 「미·일·중·러」로 바뀐 지가 오래된 것같다.<모스크바=이장훈 특파원>모스크바=이장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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