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체제모순이 경제몰락 초래”/선전사업에 외화 마구 낭비/경제「일꾼」들 일할 의욕 상실/물품부족속 당간부만 “호사”/체제불안감 쌓여 귀순 결심 지난해 7월 귀순한 전김일성종합대학 상급교원(전임강사) 조명철(36)씨는 김일성종합대와 박사원에서 「기업관리 현대화」를 전공하고 강의한 경제 엘리트로 귀순후 남북경제 비교연구를 하고 있다. 그는 귀순직전 중국에서 서구식 경영학을 연수, 북한의 경제현황과 구조적 문제점등을 서구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안목도 갖고 있다. 조씨가 직접 연구 체험한 북한경제와 대학의 실상, 구조적 문제점, 그리고 북한의 권력구조등을 그의 구술을 토대로 수기형식으로 4차례에 나눠 싣는다.<편집자주>편집자주>
나는 북한의 고급 당간부등 특권층 자제들이 다니는 남산종합학교 출신이다. 김정일과 함께 공부한 적은 없지만 이복동생인 김평일, 김영일과는 함께 공부했다. 그런만큼 탈출 전까지 아무 어려움 없이 순탄하게 살아왔다.
그러나 학자로서 양쪽 체제에 대한 비교를 할 수있는 기회가 많아 자연히 알게 된 북조선의 암울한 현실이 늘 안타까웠다. 더구나 김일성 사망후 김정일체제에 대한 불안감이 귀순을 결심한 결정적 동기가 됐다.
남한에 관한 소식은 남산학교 시절 남한 신문을 통해 처음 접했다. 남산학교는 특권계층의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였던만큼 남한에 관한 정보를 비교적 자유롭게 접할 수 있었다. 그후 김일성종합대학과 박사원을 나와 같은 대학 경제학부 상급교원으로 5년간 근무하면서 남한 현실에 관한 각종 자료를 입수하게 됐다.
92년8월부터 중국 북경언어학원, 천진시 남개대학 관리학부 유학중 북한사회가 더 이상 나아질 전망이 없다고 판단해 지난해 7월 귀순하게 됐다.
사회주의 경제를 전공한 북한 경제전문가로서 북한 경제의 실상과 구조적 문제점부터 짚어보겠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그 자체로서 개인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끌어내지 못해 생산성이 저하되는 모순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사회주의 경제를 말하려면 김정일체제 고유의 불합리성이 우선적으로 지적돼야 한다.
정치가 경제 위에 군림하며 경제논리를 깔아뭉개는 현실이 북한 경제를 피폐화시킨 주요인이다. 인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정권은 체제 유지를 위해 과도한 비용을 투자할 수 밖에 없고, 경제는 그만큼 위축되게 마련이다.
북한 경제는 김정일이 등장한 70년대 초반부터 휘청거리기 시작했다는게 북한 내부의 일반적인 평가이다. 김정일은 경제사업과 선전사업을 별개인 것처럼 인식함으로써 커다란 오류를 범했다.
김정일은 60년대말부터 70년대초까지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에서 문화예술·보도출판 분야를 총괄 지휘했다. 북한 경제의 몰락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지도자의 신분에 걸맞게 정치 경제 사회등 각 분야가 균형있게 발전하면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하는데도 선전사업에만 열을 올렸다. 이같은 김정일의 전횡과 독단이 경제전반의 흐름을 끊어놓은 결정적 계기가 됐다.
자신의 우상화를 위해 독일 영국등에서 비싼 인쇄시설을 들여오고, 각종 예술단을 해외에 무더기로 내보내는데 외화를 마구 낭비했다. 극장을 확장하고 예술일꾼을 늘리는데 혈안이 됐다. 70년초 창설된 「피바다 예술단」만 해도 3천명 이상이 배속됐다. 대대적인 인력투입과 이들에 대한 좋은 대우는 사회의 균형발전을 심각히 저해했다.
비생산적인 분야에 과도한 국가재정이 투입되다 보니 경제 「일꾼」들에게 창조적으로 일할 의욕이 생길리 만무하다. 선전선동 분야에 대한 김정일의 지나칠 정도의 관심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김정일은 89년 「2·8문화회관」에서 피바다가극단 모란봉예술단 평양예술단등 5천여명이 참여한 가극 「영광의 바다」를 관람하고는 크게 감동해 참가자 전원에게 일제 천연색TV 1대씩을 선물로 주었다. 김정일의 이같은 지시는 관리 대학교수등 평양의 지도층에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자신들도 흑백TV를 보는 마당에 공연에 참가한 유치원생 국교생에게까지 천연색 TV를 주는 것은 너무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김일성대학 경제학부 교수들은 『원료 사오고 공장 짓는데 써야 할 외화를 이렇게 낭비해도 되느냐』며 「날라리들 세상」이 왔다고 자조하기도 했다. 북한 인민들은 생산적 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공연예술 종사자들을 「날라리」라고 비하하는 경향이 있다.
김정일이 『예술극장을 하나 더 짓자』고 하면 정무원에서는 공장을 짓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경제에 문외한인 김정일이 신중한 계산없이 무조건 밀어붙여도 밑에서는 눈 밖에 날까 두려워 옳은 말을 못하고 있다.
북한 경제의 몰락은 이처럼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자체모순에 체제 유지를 위한 과도한 선전비용이 더해져 나타난 결과다. 북한 경제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이같은 북한 경제의 피폐상과 남한 경제의 눈부신 성장을 견주어 보며 박정희식 개발경제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내가 만나본 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 원산경제대학, 김일성대학 경제학부 교수들중 상당수는 『남한의 개발독재가 오히려 경제발전에 기여한 것 아니냐』는 견해를 보였다.
북한은 돈이 있어도 물품 부족으로 쓸 기회가 없는 실정이다. 북한에서 대학교수는 월급이 많은 편에 속하지만 대우가 형편 없어 불만이 크게 고조돼 있다. 대우가 낮다는 것은 교수 공급소에 갖춰진 물품이 당원이나 정무원 사무국, 중앙인민위원회등에 비해 양이나 질면에서 형편없음을 의미한다.
교수들은 자신의 직급에 맞는 공급소만을 이용할 수 있는데 상급교원(전임강사)과 부교수가 이용하는 3호 공급소는 콩기름과 담배 이외에는 구입할 수 있는 물품이 하나도 없다. 정교수들이 이용하는 2호 공급소도 고기 정도가 추가될 뿐 생필품은 거의 없다. 따라서 월급을 많이 받아도 생활은 윤택할 수가 없다.
반면 당 일꾼들이 이용하는 공급소에는 전자제품과 의류등이 비교적 잘 갖춰져 있어 지배계층 내에서도 위화감이 상당한 실정이다.
특히 최고 특권층인 노동당 간부들의 생활은 어느 자본주의 사회 못지 않다. 평양의 용성특수식료공장은 노동당 간부들에게만 공급되는 용성맥주와 고급 음료수 과자등을 만드는 곳이다. 최근에는 평양 서성구역에 「락원식료공장」을 또 지었다. 일부 생산품은 외화벌이용으로 쓰이지만 대부분 당 간부용이다.
중앙당은 황해남도 재령군에 대규모 쌀농장을, 황해북도 과일군에 과수원을 , 평양 락랑구역에 채소농장등을 직영하고 있다. 물론 이곳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평양의 중앙당 공급소를 통해 당 일꾼들에게만 공급된다.
중앙당의 일꾼은 약 1만명 정도이다. 남한의 행정부에 해당하는 정무원의 경우 부장(장관)은 노동당 중앙위원급이어서 대우가 상당하지만 부부장(차관)만 돼도 중앙당 지도원보다 못하다.
중앙당에서 정무원으로 옮겨가면 집이 바뀌고 공급소도 격이 떨어진다. 이처럼 제도적으로 특권화해있는 당의 월권행위가 북한경제 침체의 또다른 원인이다. 기업 위에 당이 군림하며 생산 외의 정치활동을 강요하기 때문에 효율적인 생산활동은 불가능하다.
김일성 김정일 노작학습, 충성의 노래모임등 각종 명목의 정치사상 교육이 생산활동보다 우선시되는 분위기에서 신바람나는 기업경영이 이루어질 리 없다. 당의 간섭과 전횡이 워낙 심하다보니 비능률적인 기업운영 방식이 발견돼도 『이렇게 고쳐야 한다』고 감히 나서는 사람이 없다.
북한 주민들은 돈이 있어도 저금소에 저축하지 않는다. 저축을 해도 남한처럼 꼭 필요할 때 찾아쓸 수 없는데다, 장마당에 나가면 비록 고가이지만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장마당에는 중국 화교들이 물건을 대는 경우가 많아 북한 돈이 화교들에게 집중되는 부작용을 빚고 있다. 화교들은 수백만원씩의 북한돈을 독에 넣어 땅속에 파묻어 놓는 사례가 많다.
현재 북한경제가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긴 하나 당장 체제붕괴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북한 주민들은 수십년간 정치사상 교육에 길들여져 왔고, 궁핍한 생활환경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또 김정일체제가 부분적 대외개방등 김일성 생전에 비해 비교적 합리적인 경제정책을 추구하고 있는 점도 어느정도 경제난 극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나진 선봉지구 개방등 합영사업을 효과적으로 추진해 경제상태를 조금만 회복시켜 놓으면 오히려 주민들의 얼굴이 밝아질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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