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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2000년대 또다른 용을 꿈꾼다(통일3국을 가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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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2000년대 또다른 용을 꿈꾼다(통일3국을 가다:13)

입력
1995.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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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통일후 가장 큰 손실은 20년 허송세월/“「도이모이」 없었다면 구소처럼 몰락했을것” 베트남 사회과학원의 유엔 추이 꾸이원장은 『통일전쟁중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통일에 대한 염원을 실천하고 민족주의가 승리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삼기에는 너무 큰 희생이었다』고 말했다. 베트남의 통일방식은 우리나라로서는 전혀 바라지 않는 방식이다. 공산주의가 주체가 된 통일이라는 점과 무력에 의한 통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무력에 의한 통일은 수많은 희생을 부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베트남은 통일이후에 더 많고 더 중요한 것을 잃었다. 정치 경제적인 통합작업에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그만큼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다. 정치적 통합과정에서의 손실로 지금까지도 남북 베트남은 적지 않은 이질감속에서 살고 있다. 잘못 끼워진 첫 단추가 통일 20년이 지난 오늘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셈이다.

 우선 통일 베트남을 이룬 집권층은 단기간에 너무나 많은 것을 남부사람들에게 요구했다. 서구 자본주의에 깊숙이 물들어 있던 남부사람들을 단기간에 바꾼다는 시도 자체가 무리였으며 이때의 시행착오가 쉽사리 완전한 통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남부지역에서 필요한 집권인력을 충원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통일정부는 충분한 행정능력을 갖추지 못한 북부지역의 군인과 당료를 대거 활용했고 그 결과 남부지역에서 정치엘리트와 대중간 괴리가 확대된 것은 물론 남북간 차별을 부각시켰다.

 통일지도자들이 전쟁을 통해 획득한 권력의 정당성을 통일 이후에도 계속 유지하려 함으로써 통일 정부가 상황변화에 적절히 대응치 못한 점도 지적되고 있다. 전쟁중의 지도자역할과 통일이후 요구되는 지도자의 역할이 구별되는 것이어서 통일시점에서 적절한 지도층의 교체가 이루어져야 했다. 지도층의 교체가 지연된 것은 76년부터 80년까지 있었던 2차 경제개발계획의 실패로도 이어졌다.

 정치조직의 중앙집권적 성격과 정치조직의 분화나 전문화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남부지역 주민들의 소극적인 저항에 통일정부가 효과적인 대응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주민통제의 강화와 정치적인 참여봉쇄등 통일정부가 추진한 일련의 강경책에 주민들이 적극 협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생산자체를 거부하기까지 했다.

 경제적인 통합과정은 특히 시행착오가 많았다. 북부 출신의 지도자들은 남부베트남 사람들의 경제에 대한 기본인식을 완전히 무시했다. 경제적으로 피폐했던 북베트남이 상당한 수준의 경제력을 가진 남부의 경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남베트남의 경제위축을 가져왔고 주민들의 이반을 몰고왔다.

 통일 베트남의 경제발전계획을 뒷받침할 수 있는 투자재원을 확보하지 못한 것도 통일베트남으로서는 큰 손실이었다. 남북간 산업구조의 차이를 살릴 수 있는 정책적 대안도 제시되지 않았다. 베트남 무역성의 흥안 한국담당과장은 『오랜시간 낭비했다. 도이모이 정책이 제시되지 않았다면 소련과 함께 베트남도 몰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개방정책이 확정된 후 북쪽에는 중공업을, 남쪽에는 경공업을 집중 육성한다는 정책을 펴고 있다. 남쪽의 우수한 경영기술을 북쪽에 접목시키는 작업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2000년대 아시아의 또 다른 용을 꿈꾸며 경제우선의 정책을 펴기 시작한 것은 결국 도 무오이서기장을 주축으로 한 현체제가 개방과 개혁을 내세운 도이모이정책으로 정책의 일관성을 갖추면서 부터다. 15년이상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통일을 실감하기 어려운 혼돈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무리한 체제의 강요, 현실을 완전히 무시한 발전 전략, 개방과 보수사이를 수차례 반복한 전략의 부재. 베트남의 잃어버린 기회들은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나라에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하노이=이종재 기자>

◎사라진 분단의 벽 높아진 마음의 벽/뿌리깊은 남북 이질감/문화·경제구조 너무달라 통합장애/남부 피해의식 상당기간 안풀릴듯

 올해로 45세인 티안씨의 친척은 모두 미국에 살고 있다. 사이공 함락직후 배를 탄 친척들과는 달리 그는 호치민에 남았다. 꽤 잘 살던 터전을 버리기 아까워서였다.

 그는 통일후 10여년간 생계수단이었던 택시운전을 그만두고 17세난 딸의 벌이만으로 살고 있다. 통일전 사이공시절의 부자생활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기대를 아예 버렸다. 『통일베트남에서 기회를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다시 찾기에는 너무 먼 것 같습니다. 완전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북부사람들이 펴는 정책으로는 기회가 쉽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티안씨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 베트남 정부관계자들의 말이다. 그러나 통일전 남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북쪽과는 아직도 적지 않은 벽이 있으며 앞으로도 상당기간 남북간의 이질감은 해소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노이와 호치민시의 직선거리는 1천4백. 육로나 철도해상으로 2∼3일이나 걸린다. 남북간에 왕래가 쉽지 않아 경제적으로도 전혀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 하노이는 중국과 호치민은 싱가포르등과의 교역이 오히려 더 많을 때가 있다. 내부간 거래보다 인근 국가와의 거래가 더 빈번한 것이다.

 남부사람들은 북쪽사람들에게 아직도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호치민시의 고위 행정관리나 경찰간부 세관원등 요직은 하노이사람들이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다. 호치민시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대부분 하노이출신이다. 하노이시민들은 거리낌없이 살아가고 있지만 호치민시민들은 그렇지가 않다.

 베트남의 지역감정은 뿌리가 깊다. 1802년 구엔왕조가 베트남을 통일하기 전까지 북부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유교문화권을 형성했다. 하노이 인근의 집 뒤에는 대나무숲이 많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시골풍경이다. 하노이의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산다고도 한다. 그러나 남부는 힌두문화와 이슬람문화의 영향을 받는 남방문화권이었다. 생김새도 북부사람들과 다르다. 베트남이 남북간 이질감을 극복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호치민=이종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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