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설치될 경수로형 원자로의 공급과 관련하여 북한의 한국표준형 원자로의 완강한 거부를 둘러싸고 한반도에서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국내여론이 비등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관심은 우리가 그 비용의 대부분을 대면서 그에 합당한 참여가 봉쇄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집중되고 있다. 물론 그렇게 될 가능성을 놓고 분노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하고 차분히 생각한다면 그저 울분을 토하고 그칠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이 사실 충분히 예상되었고 또한 현안이 단지 경수로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 사이나 나라 사이나간에 상반된 이해관계를 타협에 의해 조정하고 일정한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타협을 통해서 합의에 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당사자들이 분명히 갖고 있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기본조건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부분적인 양보나 이해조정으로는 어떤 합의에도 도달할 수 없다. 이미 작년에도 의심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북한이 남한과의 관계개선에 전혀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다는 점은 최근의 사태로 더욱 분명해졌다.
지난해 10월의 북한과 미국간의 제네바합의는 북한측의 완강한 자세끝의 「양보」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불만족스런대로 명시적 합의든 묵시적 합의든 모두 잘 지켜질 것이라는 희망적 관측을 낳았었다. 일단은 당시로서 임박했다고 여겨지던 긴장의 폭발이 유예되었다. 그러한 유예가 실질적 의미를 갖는 것은 그 유예가 현안을 대화로써 해결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로 활용될 때 뿐이다. 그러나 그동안 사태는 오히려 정반대의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북한은 자신에 유용한 북·미관계 개선에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남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서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남한이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하는 원자로의 공급문제에 관해서도 남한을 배제함으로써 남한이 제공할 비용이 마치 평화 그 자체를 위한 대가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당시로서는 국제적 제재를 포함하여 북핵문제해결의 방안이라고 생각되던 것들이 전부 탕진되고 말았다. 결국 배신감만 증폭되었고 남북관계는 제네바 이전보다 더욱 악화되기에 이르렀다.
많은 외국인들은 우리가 중국및 러시아와 국교를 정상화했으면서도 북미관계개선을 썩 호의적으로 보지 않는 점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북미관계개선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우리 안보의 초석이 되는 한미방위공약이 그로 인해 와해될 수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앞으로 10년 지나야 건설될 새로운 원자로가 당장의 에너지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에도 북한이 응한 것은 경수로형 원자로건설이 에너지난을 해결해 주어서라기보다는 미국을 군사적으로 중화할 수 있다는 전망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북한이 엄청난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군사적 이유때문에 건설을 강행한 흑연감속형 원자로의 가동중단은 그외에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북한핵문제를 놓고 약간 다른 이해관계에 놓여 있는 한미 양국이 완강한 북한의 처리방식을 놓고 막후에서 상당한 갈등을 빚고 있는 듯이 보도되고 있다. 이 점 사실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론적으로 그러할 개연성이 높기 때문에 언론은 이 문제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어쩌면 이 점, 즉 한미간의 이견노정은 북한이 얻은 부차적 소득으로 보인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북한외교의 「성공」으로까지 말하지만 합의의 정신을 깸으로써 더 이상의 대화가능성을 스스로 깼다는 점에서 성공일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아직 북한의 호의에 기대를 걸고 「더 양보하고 관용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이 전혀 없지 않은 듯 하여 답답할 뿐이다.
북한이 원자로건설에 관련하여 우리의 중심적 역할을 부인하는 한 경수로건설비용의 마련은 우리와는 무관한 문제이다. 돈이 아까워서보다는 마치 협박이 두려워서 돈을 내는 듯한 모양이 너무 좋지 않다. 그렇게 보인다면 또다른 요구가 이어질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사실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경수로문제」이후 벌어질 사태에 대한 종합적 대응전략의 마련이다. 북한의 위협으로 말하자면 핵폭탄 제조능력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아예 이번 기회를 이용, 북한에 양보할 수 있는 최후의 선과 북한에 요구할 최대한의 범위를 정해놓고 이 사이에서 유연하고 기민하게 행동할 수 있는 기본정책틀의 마련이 시급한 것으로 보인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