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기도가 정신을 바르게 하는 일이라면 동양의 수행은 신체를 바르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의 전통은 언제나 생활공간을 점유하는 살아있는 신체를 가장 소중한 것으로 존중해 왔다. 참선에서도 앉음새와 숨쉬기를 바르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스승에게 화두를 받을 수도 없다. 아랫배로 생각하라는 불교의 충고나 숨을 발바닥까지 들이켰다가 내쉬라는 도교의 권고가 모두 신체적 사고를 중시하고 정신의 고공비행을 경계하려는 데에 그 취지가 있을 것이다. 선배들과 후배들 사이에 끼여 문단의 주목을 크게 받지 못한 70년대 시인들의 특색은 시 쓰기를 일종의 수행으로 여긴다는 데 있다. 이동순 허형만 장영수 이하석 임영조 조창환 신대철 송수권등 우선 떠오르는대로 들어 보아도 소위 경기병파식의 시인은 거의 없다.
「세계의 문학」 봄호에 실린 이기철의 「열하를 향하여」도 무겁고 진지한 시이다. 신체수행의 가볍고 즐거운 국면까지 포섭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이기철의 한계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북학과 실사구시가 이기철에게 하나의 범례로 작용하는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시의 재료를 캐어내는 것이 이기철의 근본적인 시작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학이니 실사구시니 하는 낱말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기철은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다. 이기철의 관심은 「열하일기」의 내용이 아니라 열하 또는 열사라는 낱말이 전달하는 이미지에 있다. 「지원은 하룻밤에 아홉의 강을 건너/거친 모래 땅 열하에 도달했다지만/나는 아홉 밤을 불면으로 지새워도 한 개의 강을 건너지 못했다」 박지원은 열하에 이르러 18세기 조선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투시할 수 있었다. 이기철도 20세기 남북한의 현실을 투시하기 위하여 건너야 할 강들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마음 덮으면 없어지고 마음 밝히면 소리를 높이는 사막의 길들이다. 어째서 강이 사막이 되는가? 시대의 강을 건너기가 길 없는 길인 사막의 길을 건너기 만큼이나 힘들기 때문이다. 「얼마나 뜨거우면 모래가 변해 금이 되느냐/내 마음의 모래도 어느 가문 날/사막을 걷는 사람의 가슴에 금이 되어 박히겠느냐」 여행의 끝에서 박지원이 북벌의 이데올로기를 부수었듯이 이기철도 수행의 끝에서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진실에 이르기를 원한다.<김인환 고려대교수·문학평론가>김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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