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법은 실명예금의 비밀만을 보호하도록 돼 있다. 남의 이름을 빌리거나 훔친 차·도명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다. 실명제시대에는 마땅히 사라져야 할 차·도명계좌가 버젓이 실명제의 비밀보호를 받고 있다. 차·도명을 없애자고 만든 실명제가 차·도명을 키우는 꼴이다. 한일증권 동교동지점에서 지난달 발생한 「차명 증권투자사건」은 차명보호의 대표적 사례이다. 당시 김성교 동교동지점장은 자신이 끌어들인 고객의 돈 4억여원을 비어 있는 오명국씨 명의의 증권계좌로 운용하다가 오씨의 폭로로 차명임이 드러났다. 차명이 금지돼 있는 실명제시대에 금융기관 지점장이 차명을 주선한 이 사건은 『무슨 돈이길래 차명을 했을까』라는 궁금증을 낳으며 주목을 받았었다.
사건후 특별검사를 벌인 증권감독원이 4일 중간결과를 발표했다. 차명계좌는 오씨명의 외에도 2개가 더 있었고 차명자금의 규모도 13억원이라는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그런데도 정작 차명자금의 정체는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정상적인 자금이라면 실명제시대에 위험부담이 큰 차명을 굳이 이용할 이유가 없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13억원의 자금이 「정상적인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 감독원은 김지점장은 물론 최고책임자인 사장까지도 문책할것이라고 답변했다. 후속조치를 쭉 명쾌하게 말하던 감독원은 『진짜 돈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갑자기 머뭇거리며 『밝힐 수 없다』고 물러섰다. 사건 당시 김지점장은 『2억원은 내돈이고 나머지 2억원은 친구의 돈』이라고 해명했다. 감독원은 수표추적결과 김지점장의 자금은 하나도 없었고 모두 고객의 자금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김지점장이 자기돈이라고까지 싸고 돈 그 고객은 누구인가에 대해 감독원은 『밝힐 권한도 없다』고 말한다.
현행법상 차명을 이용하는 전주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 정체마저 안전하게 보호받는다면 누가 차명거래를 하지 실명거래를 하겠는가. 이렇게 되면 실명제가 아니라 차명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