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달·스케일큰 연기 명성/한때 영화제작… 말년 교통사고 고생도 3일 별세한 영화배우 박노식은 1950∼1960년대의 혼탁한 사회 속에서 든든한 의리의 남자로, 불의를 참지 못하는 사나이의 상징으로 서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전남 여수가 고향인 박노식은 순천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순천중학교등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지만 타고난 열정을 발산하기 위해 상경, 영화인생을 걸었다.
1955년 영화 「나는 너를 싫어한다」로 영화계에 데뷔한 그는 「용팔이 시리즈」등 액션물에서 스케일이 크고 활달한 연기로 명성을 떨쳤다. 투박하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에 정직하고 서글서글한 눈을 치뜨면서 악당들에게 주먹을 날리는 그의 모습은 모든 올드팬들의 기억에 생생하다.
그는 실제로 술집등에서 약자가 괴로움을 당하는 모습을 참지 못하고 번번이 주먹을 휘둘러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액션물 뿐 아니라 「카인의 후예」(66) 「메밀꽃 필 무렵」(67) 등 순수 문예물에도 많이 출연했던 그는 토속적 감성이 녹아나는 연기를 보여 후배 영화배우들의 존경을 받아왔다.
80년 자신이 제작한 영화의 잇단 실패로 실의에 빠진 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도 했지만 영화에 대한 열정을 꺾지 못하고 2년6개월만에 다시 충무로에 돌아와 『역시 박노식』이라고 박수를 받았다.
금실이 좋기로 소문난 부인 김용숙씨와의 사이에 선영 선경 선빈등 세딸과 아들 준규(영화배우·32)를 둔 박노식은 가정에서 자상한 아버지로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아왔다.
그가 마지막으로 출연한 영화는 89년에 제작된 「카멜레온의 시」로 이 영화에는 아들 준규가 함께 출연했다.
고인은 생전에 『과거의 액션스타들과 김희라 최민수 허준호등 연예인 2세들이 모두 출연하는 화려한 액션 영화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말해 왔다.
그는 88년에 교통사고를 당한 후유증으로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낮에는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의 비디오를 보거나 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회 사무실에 들러 옛동료들과 만나며 소일해 왔다.
그는 천식과 당뇨에 의한 합병증으로 이화여대 목동병원에서 1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아오다 『가망 없다』는 선고를 받고 강서구 방화동 자택으로 돌아온지 40분만에 세상을 떴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나는 영화와 우리 가족을 사랑해 왔다』고 말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권오현 기자>권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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