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올라 가장 큰불만… “그러나 통일 후회안한다” 예멘에어라인을 타기 위해 파리근교 오를리공항에 나가면서부터 통일예멘의 실상은 피부에 다가왔다. 파리와 예멘의 수도인 사나의 항공편은 일주일에 두편. 출발시간은 하오8시50분이었다. 그러나 8시30분이 되어도 대합실에는 한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탑승구를 잘못 안게 아닌가 하고 탑승권을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이상은 없었다. 출발시간이 다되어 나타난 승객은 정확히 10명. 9시반이 되어서야 탑승수속이 시작되고 보잉727은 예정보다 한시간이나 늦게 파리를 떠났다.
사나는 아라비아반도 최대의 도시로 인구는 2백여만명. 이 도시와 유럽을,그것도 일주일에 불과 2번 밖에 있지않은 항공편에 승무원보다도 적은 승객의 숫자는 통일후 이 나라의 현주소를 한 눈에 보여주는 것같았다.
통일예멘의 수도 사나국제공항은 우리나라 지방소도시의 공항보다 규모나 시설이 형편 없었다. 활주로에는 불과 10여대의 비행기가 앉아 있었다.
『통일후에 사는게 나아졌습니까』라는 질문에 택시운전사는 힐끗 쳐다보더니 『물가가 올라 사는 건 못하다』면서 『그러나 통일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묻지 않은 대답까지 덧붙였다.
합의통일 6년, 무력통일 2년째에 접어들고 있는 예멘은 아직 통일의 과실을 맛보기에는 요원해 보였다. 곳곳에서 대규모 건설과 토목공사가 진행되고 사나 시내의 풍경은 활기차 보이기도 했지만 국민의 전반적인 삶의 질과 경제는 통일 전보다 훨씬 악화돼 있다.
『통일정책이 실패했는가』라고 많은 관리들과 학자들에게 질문했다. 많은 대답중 비슷한 부분은 『종합적인 통일정책이 존재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남북예멘은 20년이상 통일협상을 진행해 왔지만 협상은 항상 정치위주였고 정치적이었다. 권력의 배분문제가 협상의 핵심사항이었다. 통일후에는 양측 지도부의 정치적 속셈에 따라 과도정부의 기간문제를 두고 치열하게 대립했다. 예멘의 통일정책이란 결국 동상이몽의 정권유지 및 재창출 정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민족번영을 우선한 종합적이고 효율적인 정책부재와 권력투쟁은 전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다.
사나대 정치학과 알 샤리프 교수는 남북예멘의 통합과정에서 가장 잘못된 점 한가지로 50대50의 산술적인 권력배분을 지적했다. 겉으로 화합을 강조하면서 실제의 목적은 상호견제와 자신의 지분지키기였다는 것이다.
장관이 북쪽출신이면 차관은 남쪽출신으로 하고 하급직까지 공평하게 분배한 이같은 행정체계 하에서 효율적인 국정운영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고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이에 따라 공무원의 수는 46만명에 이르러 국가예산의 60%가 인건비에 지출돼 경제를 압박했다.
국민들은 무력재통일후 새롭고 과감한 통일정책을 기대했다. 그러나 살레정권은 논공행상에 따라 새롭게 등장한 군부등 신권력층에 둘러싸여 개혁과 변화를 추구하지 못하고 있다. 중립적인 신문인 예멘타임스는 지난1월 사설에서 살레대통령은 측근의 볼모가 돼 부정부패를 눈감고 있으며 국민의 개혁요구수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한번 단추를 잘못 꿰기 시작한 통일정책은 권력간 갈등요인이 사라진 후에도 계속 제자리를 찾기가 힘든 것이다.
사회주의 경제체제 하에 있던 남예멘의 사유화와 경제구조조정에 대해서도 마스터플랜은 빈약했다. 남북예멘은 동서독과는 달리 큰 경제력의 격차가 없었지만 통일후 상대적으로 남예멘국민들의 불만은 커지고 있다. 물가인상 때문이다. 구남예멘의 수도인 아덴에서 만난 어부 알 사가프(40)씨는 『통일전에는 정부는 둘이었으나 국민은 하나였다』면서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정부에 국민이 둘로 갈라섰다』고 말했다. 예멘의 현실을 깨우쳐주는 대목이었다.<사나·아덴=한기봉 특파원>사나·아덴=한기봉>
◎만연한 뇌물 개혁대상 “0순위”/뒷돈 「박시시」 세수총액 맞먹어
외국인이 예멘에서 가장 먼저 알게 되는 단어는 「박시시」라는 말이다.뇌물이라는 뜻이다. 박시시는 통일전에도 있었지만 통일후 이 나라의 경제와 정치·사회를 좀먹는 가장 암적인 존재로 확산되고 있다.
박시시 없이는 되는 일이 없다.특히 공무원을 상대하려면 항시 박시시를 챙겨가야 한다. 열린 서랍속에 아무 것도 넣어줄 기색이 없으면 뭐라도 트집잡아 다시 오라고 하거나 집을 방문하겠다고 한다. 이 나라의 세수총액과 박시시 액수가 같다는 말도 있다.
예멘에 도착한 외국인은 공항세관에 짐을 찾으러 가면서부터 계약체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단계마다 작게는 카트(중독성 풀로 예멘인의 기호식품)값부터 크게는 천문학적 숫자인 뇌물을 요구받는다. 가뜩이나 행정체계가 정비안된 이 나라에서 뇌물에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 해외투자가들이 사나행 비행기를 탈리 없다. 이 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카트를 씹으니 경찰이나 공무원을 만나러 갈때나 무엇을 부탁할 때는 기본적으로 카트값을 주는 것이 「예의」로 굳어졌다. 외국인은 달러로 박시시를 줘야 한다. 달러 대 예멘리얄의 공정환율은 1대 12리얄이지만 암시장에서는 1달러에 1백리얄이다. 살레대통령의 인터뷰가 잘 안돼 중간에 사람을 넣어 부탁하려고 하니 1백달러의 박시시 요구가 들어왔다. 중산층의 한달 월급이다.
뇌물은 살레대통령의 17년 장기집권 그늘에서부터 뿌리를 내려 통일과도정부시절 남북예멘이 공직을 인위적으로 반분하면서 크게 성행되기 시작했다. 책임감이 없는 행정에다 서로의 지분을 인정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고위층의 부정부패는 군대통합은 물론 기구의 통합을 지연시켰고 특히 남예멘의 사유화를 크게 저해하는 요인이 됐다. 무력재통일 후에는 살레대통령의 친인척이 권력요직을 독점,공직 배분과 국가보조금 지급,논공행상의 과정에서 거액의 뇌물이 오가고 있다고 한다.
비교적 청렴했던 구남예멘 사회에도 박시시는 확산되고 있다. 만나본 학자마다 통일예멘의 가장 시급한 개혁은 바로 부정부패의 일소라는데 이견이 없었다.<한기봉 특파원>한기봉>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