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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 눈·귀역할 영욕 반세기(광복분단 50년: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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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 눈·귀역할 영욕 반세기(광복분단 50년:27)

입력
1995.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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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서 케이블·위성TV로 다매체시대 “활짝”/「이산가족찾기」 드라마「아씨」등 TV사에 한획/권위정권통제·권력시녀 오명등 수난 겪기도○TV방 송

 1956년 5월12일은 우리의 TV가 첫방송을 시작한 역사적인 날이다. 이날 서울시민들은 종로, 광화문등 시내 곳곳의 전파사 앞에 설치된 TV를 구경하기 위해 수십명씩 몰려들었다. 이른바 「가두시청자」였다.

 미숙한 생방송이 가져오는 잦은 NG등 갖가지 해프닝 속에 본격 TV드라마인 「사형수」가 선보인 것도 이때였다. 「사형수」는 최창봉 전MBC사장이 연출하고 「제작극회」소속의 오사량 최상현등이 출연했다. 이 무렵의 TV방영시간은 하루 2시간.

 이렇게 시작한 우리 TV방송에는 영욕의 그림자가 얼룩져 있다. 정치적 변혁기마다 보도가 손질을 당해 권력의 대변자 역할을 해야 했으나 그 속에서도  「흑백TV시대에서 케이블 TV, 나아가 위성방송시대」라는 엄청난 양적·기술적 팽창을 이룩했다.

 우리 TV방송은 먼저 민간상업방송으로 출발했다. 미국 RCA와 RCA한국대리점의 합작으로 첫 전파를 내보낸 HLKZ TV(일명 KORCAD)는 한국을 세계에서 15번째 TV방송 보유국으로 만들었다. 당시 국내 TV수상기라곤 2백여대에 불과했다. 1대 가격이 자그만치 37만 5천환으로 웬만한 집 한채 값이었다.

 그러나 HLKZ TV는 멀지 않아 재정난에 허덕였고 이를 1년 뒤 한국일보가 인수했다. 한국일보는 57년 5월6일 대한방송주식회사(DBC)로 개편, 본격적인 뉴스를 방송함으로써 TV 보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낮 12시와 하오8시30분에 방송기자들이 직접 취재한 「DBC뉴스」와 한국일보에서 제공받은 하오7시20분의 「뉴스」는 당시 딘 디엠베트남대통령 방한, 서울 양동 화재사건, 문경 시멘트공장 낙성식등 굵직한 뉴스를 생생하게 보도해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59년 2월2일 새벽에 일어난 원인모를 화재는 한국최초의 TV방송을 잿더미로 만들어 AFKN에 30분씩 우리방송을 하는 TV 더부살이의 쓰라림을 주었다.

 군사정권에 의해 2년 뒤인 61년 10월 KBS TV가 탄생했고 60년대 말부터 본격화한 3개 채널 시대는 경제개발에 따른 국산 수상기보급과 발맞춰 20년동안 눈부신 외형적 발전을 거듭했다.

 방송시간의 확대와 프로그램의 다양화는 라디오 드라마 전성시대를 무너뜨렸다. 정부가 보도를 통제함에 따라 드라마와 쇼가 전성기를 구가했다.

 특히 일일극의 인기는 엄청났다. 70년 3월에 막을 올린 김세윤 김희준 주연의 TBC 「아씨」(극본 임희제, 연출 고성원)는 71.9%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 드라마에 주부들이 정신을 판 틈을 이용해 서울에는 좀도둑이 극성을 부려 방송사가 『하오9시30분에는 물 단속, 문 단속을 합시다』라는 방송까지 내보내야 했다.

 후속프로인 「딸」도 63.6%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KBS 「여로」와 최장수 일일극(4백11회)인 MBC 「새 엄마」(이상 72년)도 선풍을 일으켰다. 하루 20분짜리 일일극이 3∼4편씩 이어지면서 급기야 저질시비까지 나왔다.

 TV가 가장 큰 변혁을 겪은 시기는 80년대. 통폐합의 명분으로 내세운 공영제도는 KBS와 MBC 양방송사 체제를 낳았고 5공화국 정권은 방송의 오락화에 열을 올렸다.

 「색채혁명」으로까지 불리워진 80년 12월말에 시작된 컬러방송은 의상 가구 빌딩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방송사가 앞장 서 프로야구단을 창단, 스포츠와 컬러TV의 결합을 시도했다.

 당시 방송을 빗대 말한 「띠띠 전」이 상징하듯 보도는 제한된 채 정부홍보에 급급했고 오락물은 더욱 저질화로 치달아 독점적 방송행태의 부작용만 커졌다. 이 가운데 방송 제자리찾기의 싹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장장 4백53시간의 생방송기록을 세운 83년 6월의 KBS 「이산가족찾기」는 국민들에게 진정한 공영방송의 의미와 역할을 깨우쳐 주었고 3년후 편파 왜곡에 항의, 불길처럼 번진 KBS시청료 거부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방송이 컬러를 마음껏 이용해 발전시킨 프로그램은 자연 다큐멘터리분야. 아름다운 영상으로 펼쳐놓은 자연은 시청자들을 신비와 감탄의 세계로 몰아갔다.

 방송기술 선진화의 열매들은 미니시리즈의 탄생과 「TV문학관」등 예술성 높은 작품의 제작, 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 중계등으로 나타났다.

 91년 탄생한 SBS로 지상파TV는 공·민영시대로 복귀했고 김영삼정부는 국제화시대를 표방하며 케이블TV와 지역민방(오는 5월1일부터 방송)을 도입했다.  TV는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 들어섰고 위성방송시대를 눈앞에 둔 변혁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방송학자들은 『그릇만 커졌을 뿐 프로그램은 아직 그 그릇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선진문화를 위해 TV가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말하고 있다.<이대현 기자>

◎임택근·박종세·구민·고은정·임국희씨등/“천의 목소리 얼굴없는 스타”인기 한몸에

○라디오

 광복 후 라디오는 국민의 문화욕구와 정보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키는 주요한 매체 역할을 해 왔다.

 1945년 8월15일 일왕의 항복선언을 도쿄(동경)방송과 동시에 중계해 국민을 거리로 뛰쳐나오게 한 경성방송국(JODK·1927년 개국·현KBS 1AM)이 유일했던 라디오는, 현재 10개 방송사가 15개의 전국채널(AM 6개, FM 9개, 지방 채널 제외)을 운영하는 규모로 늘어났다.

 해방 한달만에 미군정청이 접수해 우리의 해방감을 위축시켰고, 한국전쟁 당시 대전으로 도피한 이승만대통령이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서울 시민은 안심하라』는 거짓 방송을 내보내는등으로 악용되기도 했지만 라디오가 문화를 이끌어온 공로는 크다.

 TV방송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보도, 교양, 오락프로그램의 기본 형태는 라디오로부터 비롯되었다.

 53년 신세계백화점 4층에서 처음으로 공개방송된 「노래자랑」, 퀴즈프로그램인 「스무고개」 「재치문답」, 청취층을 특화시킨 60년대의 「장수만세」 「가로수를 누비며」, 드라마인 「광복20년」 「아차부인 재치부인」등은 인기와 함께 모범적인 프로그램으로 평가를 받는 작품들.

 아나운서 강찬선 임택근 전영우 박종세, 성우 구민 고은정 최응찬(작고) 임국희, DJ 최동욱등 목소리 하나로 인기를 얻었던 라디오 프로그램의 주인공들은 우리 방송의 공신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80년 컬러TV의 도전과 95년 케이블TV의 거센 공격을 받고 있는 라디오는 과거의 영화를 많이 잃어가고 있다. 그 대신 채널이 특성화하고 있다. 음악, 종교, 교육, 교통등으로 세포분열한 라디오는 각각 특정한 계층으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권오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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