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배짱있게 나가고 있다. 북한이 한국형 경수로 수용을 거부한다면 자금을 한푼도 대지 못하겠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경수로문제가 심상찮게 돌아간다는 징후가 나타나더니 마침내 우리정부가 돈을 못대겠다고 으름장을 내놓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북한의 배짱에 맞서 우리도 배짱을 부리는 셈이다. 그런데 정부가 이처럼 막 나가는데도 왜 그런지 모처럼 정부가 잘 대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재주넘는 곰처지
김영삼정부의 경고강도가 어느정도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국형을 못받겠으면 말아라. 우리도 못대주겠다. 북한이 또 한번 카터를 부르든지 말든지 우리는 알바 아니다…」진짜로 이런 배수의 진을 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그것이 사실이라면 좋겠다. 북한을 보는 정부의 시각이 이인모노인을 북한으로 송환할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는 것처럼 보여 좋다.
경수로 문제에서 우리가 처한 상황은 참 딱하다.미국이 잘 못하는 것인지 우리가 잘못 대응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한마디로 『내배 째라!』고 배짱을 부리며 덤벼드는 사람과, 손 안대고 코 풀려는 사람사이에 끼여 있는, 적당히 마음씨 좋고 적당히 배부른 사람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지.
최근의 경수로협상 추이를 보면 틀림없이 이같은 형국이다. 한국형이라는 말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난데없이 「미국형」이 협상의 의제가 되고 있다. 우리가 경수로 건설에 지원할 금액은 대략 30억 달러로 총건설비의 70%선이다. 나머지 대부분은 일본이 대고 그 밖의 10여개 나라가 형식적으로 참여한다. 미국은 한푼도 내지 않는다. 그런데 북한과의 협상은 미국이 하고 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누가 챙기는 식이다.
○제속셈찾는 미·일
미국의 대한반도 전략은 핵문제의 해법과정에서 손쉽게 드러난다. 미국은 한국이 우방이긴 하지만 국익을 위해 북한과 외교적 거래를 할 수도 있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을 동결시켜 핵확산금지조약(NPT)체제를 유지시키고 한반도의 「현상유지」(STATUS QUO)를 깨뜨리지 않는다는 속셈을 갖고 있다. 현상유지 전략은 우리의 통일정책과는 거리가 멀다. 여기에 미국의 체면을 살리고 여분으로 클린턴행정부의 정치·외교적 성과를 고양시킬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는 식이다.
이런 어수선한 판에 일본은 연립여당 대표를 평양에 파견해 수교문제를 논의하게 한다. 연립여당 대표의 방북이 타이밍상 북한의 대외협상력을 높여주게 될 것인지 아닌지를 일본정부는 굳이 따지려 하지 않는다.
이런 시점에서 정부가 배짱을 부리고 나선 것은 잘 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 정부는 지금까지 미국 일본과의 3국공조를 너무 과신해 왔다. 애시당초 전략목표가 다르고 이익의 급부가 다른데 막판까지 공조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한 것부터가 잘못이다.
○내부의 합의 중요
우리가 경수로를 지원하겠다는 것은 돈이 철철 남아돌아가서가 아니다. 가능하면 우리 돈으로, 우리 기술로 우리의 동족을 돕겠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우리의 불이익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아 우리를 빼고는 누구하고도 대화하면서 그들 인민의 이익보다 우리를 약올리는 일에 더 머리를 쓰고 있다. 그런데 얄밉게도 협상력 하나만큼은 기차게 갖추고 있다.
지금 미국에 얘기할 것은 당당하게 해야 한다. 북한에 대해서는 연민의 정을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가 북핵문제에서 더 이상의 봉은 아니다. 이 점에서는 우리 내부에서 인식의 일치가 있어야 한다. 국익을 앞세운 국가외교가 얼마나 냉엄한가를 김영삼정부는 깨닫고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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