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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장군 행적 학계논란/정문연 구술·증언자료집 발간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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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장군 행적 학계논란/정문연 구술·증언자료집 발간계기

입력
1995.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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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사변 연루·사회주의자여부 의견맞서/김좌진장군 암살배경·주체싸고도 이견 1920년 봉오동·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무장항일투쟁의 거두 홍범도(1868∼1943)장군의 구술과 그에 관한 증언자료들이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홍범도편」으로 발간됐다.

 홍장군에 관한 자료가 전무한 상황이어서 「홍범도 구술 자전」등 증언자료들은 학계의 정밀검토가 필요할 것같다. 특히 구술자전은 누가 구술받은 것인지 불명확한 채 홍장군이 1938년이후 수위로 지낸 극장의 관리인 태장춘씨의 부인 리함덕씨가 베껴 쓴 것을 항일빨치산 리인섭이 보관해 왔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원본은 러시아의 한인작가 김기철씨가 이씨로부터 빌려갔다가 유실됐다.

 연구책임자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성수교수는 이 자료를 통해 지금까지 알려진 바와 달리 홍장군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며 자유시사변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주장한다. 자유시사변은 1921년5월 코민테른이 연해주지역 항일무장세력을 통합지휘하기 위해 파견한 깔란다라시윌리 휘하의 적군이 이에 저항하는 민족주의계열 무장세력을 공격, 무장해제한 사건이다.

 박교수는 이어 구술증언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돼 비참한 말년을 보낸 행적으로 미루어 홍장군은 독립투쟁을 위해 좌파계열과 함께 싸웠을 뿐 목적의식적인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고 해석한다. 또 이 자료를 통해 김좌진 이범석장군등에 대한 좌파 독립운동조직의 조직적 암살기도가 구체적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반면 국민대 조동걸 대학원장은 홍장군의 자유시사변전투 참가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여운형의 모스크바 기행문등으로 미루어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여운형은 기행문에서 홍장군이 자유시사변의 승자인 이르쿠츠크파 재판장 자격으로 패배한 상해파를 재판하는 모습을 배심원으로 참석해 목격했다고 썼다는 것이다. 또 레닌훈장까지 받았으므로 홍장군을 사회주의자로 보아야 하며, 김좌진장군 암살은 민족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좌파계열의 조직적 암살계획의 일환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암살범 박상실이 친일변절자라는 연구결과도 나오고 있다고 소개했다.

 정문연의 자료집은 ▲홍범도 구술(1부) ▲김세일씨가 소설을 집필하는 동안 항일투사들이 보내온 서신(2부) ▲연해주의 대표적 무장단체 관련 기록(3부) ▲관련인명 색인(4부)등으로 구성됐는데 항일빨치산들의 회고에는 상충되는 내용도 들어 있다. 김세일씨는 59년 항일빨치산 리인섭의 우즈베키스탄 집에서 「홍범도일지」를 발견, 이 일대에서 홍장군에 관한 증언과 기록을 수집해 90년에 장편소설 「홍범도」(제3문학사·전 5권)를 펴낸 재러 소설가이다.

 김좌진장군에 대한 좌파계열의 암살예비는 자료집의 「적기단략사」에 실려 있다. 적기단은 선언서를 통해 『김좌진 김규식 이범석등 일파들과 결정적 투쟁을 실행하겠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서울대 신용하교수는 『「홍범도 구술 자전」은 매우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며 『자료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자료의 진실성에 대한 검토는 앞으로 학계가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평양에서 태어난 홍장군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머슴살이하다 1896년 의병을 조직, 일제에 대한 항거를 시작했는데 청산리전투 후 노령으로 넘어간 시기나 배경, 그 이후의 행적이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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