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같은 어둠 속 미니어처 야간열차가 불을 밝히고 무대 위를 가로지르는 장면으로 「표류」는 시작한다. 이어서 등장하는 여행객, 그의 분신인 인형들과 함께 관객들은 곧바로 현실로부터 일탈하여 필립 장티가 초대하는 여행에 동참한다. 차창밖에 펼쳐지는 장면들은 풍부한 상상력과 치밀한 계산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환상들이다. 공연을 통해 그의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떠오르는 단어는 「평형」이었다. 그곳은 대비되는 개념들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곳이다. 배우와 크고 작은 인형들의 확대 축소를 통해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소우주이면서 동시에 대우주인 곳, 중력과 무중력, 움직임과 정지가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환각의 세계, 바다와 사막 도시가 순식간에 세워졌다 변형되는 곳, 낯선 풍물인 듯하면서도 언젠가 한번쯤 꿈 속에서 가보았던 것같은 친숙한 세계이다.
생명체인 배우들이 무생물인 인형들과 고무줄 거대한 천 비닐등의 물체들로 만들어내는 공간은 태초의 생경함과 세기말적 퇴락함, 거짓된 실제와 진실된 허구, 절망과 희망, 그로테스크함과 숭고함, 장난스러움과 진지함, 자아의 분열과 합일, 영혼과 육신의 분리와 합치가 이어지는 풍부한 이미지의 바다이다.
그곳에서 한시간 반동안 표류한 관객들이 다다르는 곳은 처음 상상의 기차에 올라탔던 역, 설레는 마음으로 떠났다가 많은 것을 겪고 마침내 도달하면 안도하는 곳, 그러나 다시 머뭇거리며 떠날 것을 예감하는 영원한 정거장이다.
프랑스 연출가 필립 장티는 불과 다섯명의 배우들이 펼치는 마술 인형극 마임 무용과 스태프들의 절묘한 기계조작및 조명효과를 통해 여행길의 관객들을 끊임없이 놀라게 하고 즐겁게 해준다. 사색적인 모티브들을 추상적 관념으로 드러내지 않고 구체적인 이야기와 정확한 움직임으로 풀어나가는 무대는 서양 공연예술의 전통적 기술과 세계관이 집결된 공간인 동시에 후기산업사회 속의 인간의 모습과 관점이 비쳐지는 거울이기도 하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이 흥미를 잃는 순간도 있었다. 완벽한 균형이 계속될 때의 답답함, 각 에피소드들의 페이스가 지속적으로 동일한데서 오는 지루함, 배우들이 관객과의 생생한 교류를 즐기기보다는 필립 장티의 작품을 일방적으로 보여주려고 긴장하는 모습등이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얼핏 방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언어의 장벽 때문에 문화간의 교류가 가장 어려운 연극계에 찾아와 언어가 갖는 한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환상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간 필립 장티극단과 이를 초청한 동숭아트센터에 찬사를 보낸다.<이혜경 연극평론가>이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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