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과정 잦은실책… 우리에 좋은 교훈/“「작은전투」실패해도 결국 「큰전쟁」 승리” 독일 아데나워 재단의 부카르트 도비예박사는 통일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찾아오는 한국의 관료·학자로부터 매번 같은 요구를 받고 곤혹스러워한다. 이 요구는 통일직전 서독정부가 갖고 있던 「흡수통일 종합계획서」를 보여달라는 것.
도비예박사는 내독성에서만 20여년간 재직했으며 통일당시에는 정책실장으로 실무책임을 맡았다. 한국의 「통일학도」들은 그와 같은 계획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도비예박사의 대답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독일 통일의 마스터플랜은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면서 『한국인들이 독일통일에 대해 엇갈린 평가를 내리는 것은 이같은 점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콜총리의 말을 인용, 『우리는 그때 차편을 놓치면 영원히 통일열차에 오르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면서『자세한 여행계획을 「예약」할 시간적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같은 재단의 실케 크리거박사는 『장군이 전쟁을 계획할 수는 있지만 첫 포탄이 발사된 다음에는 장군보다 일선지휘관이 상황을 책임지게 된다』고 비유하면서 『한국인들이 독일통일을 비판하는 것은 전투의 실패를 전쟁의 패배로 오해하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통일의 공과에 대해 동서독간뿐 아니라 서독쪽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집권기민당 계열인 아데나워재단의 전문가들과는 달리 사민당계열 에버트재단의 전문가들은 통일을 실패투성이의 정책이라고 낙인찍는다. 한국인들은 90년 독일통일을 본 순간 같이 「통일열병」을 앓다가 후유증을 목격하면서 남북한이 동반자살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통일공포증」에 시달려왔다.
독일정부의 통일정책에는 분명 실수가 많았다. 재무부의 베너과장등 실무자들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느낌』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우선 40여년간의 교류협력을 통해 얻어진 정보로 동독을 잘 알고 있다고 여긴 것이 실수의 출발이었다는 것. 정부가 입수해온 동독경제에 관한 통계는 모두 허위였고 사회주의 경제의 우등생이라던 동독은 저절로 쓰러질 정도로 병들어 있었다.
정부는 동독지역에 첨단산업을 유치했지만 이는 도리어 대량실업을 낳았다. 첨단산업은 노동력을 적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동독지역에서의 각종 여론조사를 토대로 서독의 법체계를 그대로 동독지역에 이식했지만 이는 통일의 충격을 가중시켰고 주민들은 적응하지 못했다. 재산권의 원소유자 반환조치는 일시적으로 환영을 받았지만 이 때문에 동독지역 부동산의 30%가량은 아직도 주인을 찾지 못한 채 버려져 있다.
급격한 화폐통합이 기존기업의 도산과 급격한 인플레를 낳은 대표적인 실책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입주자를 기다리며 방치돼 있는 라이프치히의 플라그비츠 중소기업공단, 동독의 가출소녀들과 서독출신 포주들이 득실거리는 베를린의 뒷골목을 찾으면 이같은 실책의 후과를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쇼핑을 즐기는 동독주민들의 밝은 표정, 동독지역의 신·구 건물을 건설하기 위해 세워진 거대한 크레인의 숲들은 통일이 결국은 독일인 모두에게 엄청난 혜택을 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는 없게 된다.
독일은 통일에는 성공하고 그후 사회를 통합하는데는 몇가지 잘못된 방법을 택했다. 이같은 전투의 패배가 큰 전쟁의 승리를 퇴색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이같은 「전투의 패배」는 통일의 여행일정을 한창 예약중인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다.<베를린=유승우 기자>베를린=유승우>
◎연방정치교육센터/이질감해소 목적 교사재교육 등 통일연수 활동
독일 통일을 앞당기게 한 주요 요인중의 하나는 흔히 TV등 방송의 자유로운 시청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 연방정치교육센터의 뮐러소장은 『TV가 통일후유증을 증폭시켰다』는 역설적인 주장을 폈다.
뮐러소장은 『동독가정의 TV수상기에는 서독의 고소득 생활과 극단적인 모습만이 비춰졌다』면서 『그러나 이같은 생활을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노력은 비춰지지 않았고 동독인들에게 통일후 많은 좌절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연방정치교육센터는 통일후 동서독간의 이질감해소를 목적으로 내무부 산하에 둔 기관이다. 의회와 학술자문단의 감독을 받으며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는 이 기관은 각종 세미나와 토론회를 주관하고 3종류의 정기간행물및 단행본을 출간하고 있다. 연간예산 8천만마르크(한화 약 4백48억원)중 3분의 2가량인 5천5백만마르크는 서적및 간행물 발간에 충당한다.
이 기관이 발행하는 일간지「DAS PARLIAMENT」신년호의 경우 콜총리의 시정연설과 샤핀 사민당당수의 연설을 각각 1면과 3면에 게재하고 있다.
통일후 이 기관의 연수활동중 중요한 것은 동독지역 사회·정치담당 교사들의 재교육. 이 또한 형평성을 유지하고 적극적인 토론을 유도하기 위해 동서독출신 교사를 반반씩 섞어 연수반을 구성했다. 동독주민들뿐 아니라 서독측에서도 상대에 대한 편견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관에 상근하는 2백30명의 요원중 동독출신은 단 한명도 없다. 뮐러소장은 『통일후 정부 재정부담이 늘어나 동독출신 직원을 채용치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본=유승우 기자>본=유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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