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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광복 분단 50년: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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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광복 분단 50년:26)

입력
1995.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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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약광고」서 첨단 컴퓨터영상으로 “상전벽해”/60년대들어 CM송 등 선진기법 시동/작년 총광고비 4조… 거대산업 탈바꿈 지난 50년 동안 각기 다른 길을 걸어온 남북한의 사회상 가운데 이질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 중의 하나가 광고이다. 북한은 체제와 정권유지의 필요성에 의해 선전술을 발달시켜 왔고, 남한은 「한강의 기적」에 걸맞는 산업적·상업적 광고를 눈부시게 발전시켜 왔다.

 광복 당시 몇몇 신문이 거의 전부였던 광고매체는 오늘날 컬러 TV 시대를 지나 케이블 TV와 위성방송시대로 치닫고 있다. 광고표현도 50년대 인쇄매체의 거칠고 소박한 「동네 약광고」수준에서 첨단 컴퓨터그래픽영상을 이용해 놀라운 광고이미지를 창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공식적으로 처음 집계됐던 68년의 총광고비가 92억원 정도였던데 비해 94년에는 4조2백84억원으로 26년 동안에 약4백40배나 폭증, 광고사업 자체가 탄탄하고 전망있는 「산업」으로 자리잡게 됐다.

 광복부터 1960년 이전까지는 광고성장에 필요한 토양 자체가 빈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피폐했던 일제강점기의 경제는 광복 후 6·25전쟁을 맞으면서 가사상태로 접어들었다. 또 광고매체라고 해야 50년대 초반까지도 1일 4면 발행이 고작인 일간지와 「사상계」등 몇몇 월간지가 전부였다.

 인쇄매체에 남아있는 당시의 광고를 보면 소비재 중심의 투박한 광고가 대부분이다. 신문광고의 경우 지면과 광고주의 영세성으로 최대 3단 10㎝ 크기를 넘지 못했으며 아직 사진식자기술이 없어 큰 글자는 손으로 직접 그렸다.

 공고나 구인광고를 제외한 상업광고로는 구한말 때부터 신문광고의 맥을 이어온 약품광고와 극장프로광고가 주종이었다.

 한 예로 55년의 럭키치약 일간지광고는 「미국원료, 미국처방, 독일기계로 된 제품임으로 품질이 미제와 꼭 같습니다」는 광고문안도 등장, 웃고 넘길 수 없는 당시 풍속의 일면을 보여준다.

  56년은 라디오에 앞서 HLKZ TV가 최초의 민간상업방송을 개시하면서 비록 슬라이드필름을 이용한 것이었지만 TV CF가 시작됐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방송광고에 대한 광고주의 인식이 낮아서 영업담당자가 휴대용 수상기를 들고 다니면서 일일이 광고효과와 가능성을 설명해야 할 정도였다. 당시 HLKZ TV의 프로그램 광고로는 OB맥주, 경전(현 한전), 크라운맥주등이 눈에 띈다.

 5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는 광고에 대한 인식변화가 엿보인다. 한국일보는 59년 당시 돈으로 2백만환이라는 거금을 걸고 국내 최초의 광고상인 한국광고작품상을 제정했다.

 같은 해 개국한 부산문화방송(라디오)은 전파매체광고의 핵심이라 할 CM송의 물꼬를 열었다. 광고에 보다 많은 창의성과 아이디어가 본격적으로 요구되기 시작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진로소주 애니메이션 CF와 「차차차」리듬을 차용한 특유의 진로CM송이 선보인 것도 이 시기이다. 닭표간장 CM송도 선보였으며 박카스광고가 인쇄광고와 전파광고를 통해 본격적으로 흘러나갔다.

 한국광고는 68년 코카콜라 상륙을 계기로 국제적 수준으로 성장할 계기를 잡았다. 다국적상표인 코카콜라는 한국상륙과 함께 마케팅개념을 도입한 선진적인 광고전략을 선보였다.

 「산뜻한 그맛, 오직 그것뿐」이라는 광고문안으로 70년대에 가장 성공한 광고로 꼽히는 코카콜라의 광고는 광고대행사를 이용한 최초의 광고였으며 철저한 시장조사에 따라 매체별로 콜라 마시기를 권한 선구적 광고였다.

 산업발전에 따라 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 광고주에도 순위가 생기고 또 그 순위가 변동됐다.

 69년 월간「합동광고」에 발표된 10대 광고주에는 1위부터 5위까지 제약회사가 휩쓰는등 약품광고가 광고의 주류를 형성했으나, 70년대 말에는 태평양화학, 삼성전자, 대한항공, 금성사, 롯데제과, 해태제과, 대한전선등 화장품과 음료수제조업등의 광고가 수위를 점하기에 이르렀다. 70년대말에 짜여진 광고주 순위는 지금까지 대부분 유지되고 있다.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70년대 후반부터는 광고제작의 주도권이 광고주로부터 광고대행사로 넘어갔다. 제작에 관한 한 광고주의 생각보다 프레젠테이션을 통한 광고대행사의 경쟁이 좋은 광고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카피라이터의 전문성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현재의 광고는 81년4월1일 컬러 TV광고가 시작되면서 기본적인 골격이 형성됐다. CF의 색조, 화면의 조합방식, 음향, 카피등 CF전략의 혁명적 변화가 전반적으로 뒤따랐다.

 제품에 대한 시장조사, 아이디어 생산, 광고제작등을 기본으로 하는 광고산업의 급속한 발전은 경제력 뿐 아니라 이러한 광고매체의 기술적 발전에 크게 힘입어 왔다.<장인철 기자>

◎광고회사 발자취/57년 한국일보 광고국서 첫 설립/70년대부터 대행사들 등장 신종기업 각광

 광고회사는 오늘날 젊은이들 사이에 가장 인기있는 직장 중의 하나이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이미지, 높은 보수, 개선된 사회적 인식, 미래산업으로서의 장래성등이 매력을 주고 있다.

 광복 이후 최초의 광고회사는 57년 한국일보사 광고국에 설치된 한국광고사였다. 당시 윤동현광고국장은 다른 지방신문사의 광고부 직원까지 불러 연수시킬 정도로 업무내용과 규모를 키워가며 독립적인 광고회사 체제를 준비했으며 60년에는 최초의 광고전문지인 「새광고」도 창간했다.

 이는 67년 합동통신사내에 광고기획실이 생기고 69년 광고회사인 만보사가 설립되는데도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70년대초부터는 광고대행업이 신종기업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제일기획, 오리콤(75년 합동광고 흡수통합)등 10여개의 광고대행사가 설립된다. 그러나 73년 오일쇼크로 경기가 침체, 후라이보이 곽규석(곽규석)이 설립한 선진등 신생사 대부분이 도산했다.

 70년대말부터 80년대 중반까지는 코래드 대홍 동방 삼희 금강 LG애드등 재벌그룹의 계열사 광고회사가 잇따라 설립되면서 이 하우스 에이전시(계열사 광고회사)들이 광고대행업의 주류를 형성한다.

 최근 광고회사는 또다시 급속한 체제변화를 겪고 있다. 전에는 중심이 광고제작에 있었으나 시장조사 전략기획등 부수적인 업무가 강화되고 있다.

 외국 광고회사는 자본투자형식으로 88년부터 국내에 진출했다. 또한 종합광고대행사만 50개사가 넘는 우리 광고산업도 세계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다.<김관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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