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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간첩 한병훈씨 회견/“사상갈등느껴 박 총장살해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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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간첩 한병훈씨 회견/“사상갈등느껴 박 총장살해 포기”

입력
1995.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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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독쾰른서 처음만나 방북사실 고백/유럽·국내에 북포섭학생 많다고 들었다” ―기자회견을 하게 된 경위는.

 『22일 박홍총장의 법정 진술이 와전되고 있다고 판단해 진실을 명확히 밝히고자 기자회견을 하게 됐다. 더 이상 나같은 사상의 희생자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 모든 것을 알리고자 참회하는 심정으로 나왔다』

 ―박총장과 어떻게 만났는가.

 『90년 8월 중순께 독일 쾰른에서 서강대 출신의 이모씨를 통해 박총장을 처음 만났다. 이후 박총장과 함께 벨기에 반느성지를 순례했고 쾰른의 자취방으로 박총장을 초대해 이 자리에서 방북사실을 고백했다. 상대방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것이 신뢰감을 주어 포섭에 유리하다고 생각했으며 박총장이 신부이기 때문에 평소 갖고 있던 사상적인 고민을 털어놓고 싶었다. 박총장이 방북사실을 남한 정부당국에 알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박총장에게 접근한 이유는.

 『88년 이후 4차례 방북했다. 90년 3번째 북한에 갔을 때 유명인사를 포섭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국내에서 발행되는 월간잡지등을 통해 박총장이 민주적이고 양심적인 인사라는 것을 알고 내가 선택했다. 북한에서 특별히 박총장을 지명하지는 않았다』

 ―북한으로부터 지하당을 조직하라는 지령을 받았다는데.

 『92년 박총장에게 국민당에 입당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했다. 박총장은 신부가 특정정당을 지지할 수 없기 때문에 주선할 수 없다고 했다. 국민당에 직접 가 관계자를 만났으나 당시 나는 군복무중이었기 때문에 입당할 수 없다고 했다』

 ―북한이 왜 박총장을 살해하라고 명령했는가.

 『김일성사후 북한은 분위기가 격앙돼 있었다. 그런데 박총장이 지난해 주사파 발언을 하자 한총련 세력이 크게 약화되는 등 북한의 대남공작을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박총장을 살해하면 미화 50만달러의 사업자금을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는데 왜 실행하지 않았는가.

 『당시 심한 사상적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81년 부산 고신대에 입학한 후 의식화 서클을 조직해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85년 독일로 유학가 통일을 위해서는 남과 북이 서로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서 북한에 갔었지만 북한은 나를 체제유지의 수단으로 삼으려 했다. 심한 사상적 갈등을 느끼고 있었고 혁명을 위해 박총장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동안 북한에서 공작금을 받았나.

 『최소한의 경비밖에 받지 못했다. 북한의 대남공작이 변경돼 예전처럼 많은 돈을 투입하지 않는다. 대신 지하당을 조직하면 별도의 지원금을 주겠다는 말은 들었다』

 ―유럽과 국내에 한병훈씨처럼 북한에 포섭된 학생이 많다고 했는데 만난 적이 있나.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들었다』<이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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