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먹고 살기가 나아지고 재산은 늘었지만 얻은 것은 무엇인가. 사랑은 메마르고 믿음은 가차없이 깨져 나간다. 아버지를 죽이는 사회병리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가족의 의미와 부모―자녀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고 있다. 작가들이 육친을 잃고 써낸 영혼의 고백은 그런 점에서 소중하다. 그들의 추억과 체험이 담긴 자전적 소설은 삶의 이정표를 문학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꾸준히 읽히는 스테디셀러가 되고 있다. 이른바 「가정소설」로 명명되는 작품들을 주목하게 되는 시점이다.
복거일씨는 올해초 장편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을 내놓았다. 지난해 병으로 사망한 아버지를 추억하며 전쟁과 70·80년대를 거치면서 가족이 살았던 기지촌 부근의 사회를 시간에 따라 엮어 나간 이 소설은 작가의 처음 생각대로라면 「아버지의 변명」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을 것이다.
대전부근 절골의 미군부대 캠프 세네카와 원주민인 안동네 사람들, 그리고 기지촌 사람들이라는 세 공동체를 통해 전통사회의 변화를 그린 작품에는 작가의 성장체험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꼼꼼히 기록돼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부역자로 몰려 도망다니던 지식인, 고향을 떠나 기지촌을 전전하며 생활을 꾸리면서도 기지촌아이로 천대받지 않게 후미진 구석까지 자식을 챙기던 아버지를 작가는 「어려운 시대를 대범하게 헤쳐나온 한 지도자」의 인상으로 그리고 있다.
「어린 날부터 나는 어머니가 젊고 아름다운 어머니였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학교에 오시는 걸 몹시 부끄럽고 창피하게 여기고 있었」고 학교에 오셨던 날 「짝아이에게 할머니라고 거짓말 하였던 잘못」을 저질렀다. 한국일보에 「사랑의 기쁨」을 연재중인 작가 최인호씨가 87년 어머니를 여의고 써낸 「어머니가 가르쳐준 노래」에는 어머니에 대한 정과 한이 농축돼 있다. 재산 많은 집안에서 자랐으나 여자는 교육받을 필요가 없다 해서 못 배운 어머니가 말로 남겼던 『너는 거짓말을 하지 말고 허영의 꽃을 키우지 말아라. 그럴 바에는 차라리 빈 화분을 붙들고 울어라』는 한 가지 가르침을 되씹으며 작가는 『죄 많은 아들의 지난 과거를 모두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 그가 50대 어머니와 20대후반의 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집필중인 「사랑의 기쁨」에 나오는 딸 채희는 작가의 여성화한 모습으로 보인다. 격렬한 모녀간의 갈등과 애증을 통해 작가는 사랑의 의미와 가족의 소중함을 드러내 가고 있다.
먹을 것이 없던 종전직후 50년대의 쓰라린 추억을 담은 김원일씨의 「마당 깊은 집」에는 자식을 이끌고 험한 세월을 헤쳐 가는 어머니가 나온다. 어머니 타계후 6년만에 써낸 이 장편에서는 근검하며 정절을 지키는 모진 여인상이 두드러진다. 홀몸으로 단칸방에서 삯바느질하며 밤늦게까지 재봉틀을 돌리고 자식들이 잠깐 졸면 사정없이 어깻죽지에 매를 안기던 어머니는 호의호식하며 자란 요즘의 젊은 세대가 꿈에서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이다. 김씨는 『가난과 어머니를 통해 삶의 소중한 가치들을 배웠다』고 말한다.
「영웅시대」 「변경」등에 월북한 지식인아버지의 그림자와 가족사를 담아 온 이문열씨는 지난 1월 어머니를 여의었다. 소설 속에서는 독립된 인격으로 묘사된 적이 거의 없었던 어머니를 추억하며 작가는 장편 「시인」처럼 변형된 형식이든 삶 그대로를 써내는 방식이든 『앞으로 어머니 당신의 행장을 정리하는 글을 써 보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또 전쟁으로 형제 잃은 경험을 여러 중·단편으로 써온 박완서씨는 「여덟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은 아픔을 애닯게 진술하고 있다.
이밖에 올들어 부모상을 당한 작가 김용성 염재만 조해일 조태일 윤성근, 평론가 홍정선 오양호씨의 부모상실체험이 앞으로 문학작업에 어떻게 투영될지 주목되고 있다.
안확이 「조선문학사」에서 처음 사용한 가정소설이라는 말은 한국소설의 한 하위갈래를 가리키는 용어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문학은 삶의 모태가 되는 가정문제를 다루는데 소홀한 편이었다. 숙명여대 최시한(국문학)교수는 『핏줄을 앞세우는 가족의 논리와 서구의 이성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사회의 논리 사이에서 헤매는 동안,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가 되고 가족주의는 가족이기주의나 맹목적 집단주의가 되었다』고 우리 가정의 부정적 측면을 지적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 소설은 아버지를 다루는데 극히 인색하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설명되는 이 「아버지 기피증」은 간혹 아버지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도 아버지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게 한다.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사씨남정기)」에서 시작되는 우리 가정소설은 이인직의 「치악산」 염상섭의 「삼대」 채만식의 「태평천하」에 이어 현존작가로 최인호의 「가족」연작, 김성동의 「집」, 최일남의 「그리고 흔들리는 배」, 조선작의 「바람의 집」, 박완서의 여러 작품으로 줄기가 뻗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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