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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소년(박완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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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소년(박완서칼럼)

입력
1995.03.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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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자리의 소년이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 전철 안에서 책이나 신문을 읽는 일은 흔한 일이지만 그 소년의 책 읽는 모습은 특이했다. 한 페이지에 적어도 서너군데씩은 밑줄을 치면서 읽고 있었고, 표정도 영어단어를 달달 욀 때처럼 고통스럽고 절박해 보였다. 시력이 시원치 않은 내 곁눈질로는 무슨 책이기에 그렇게 밑줄을 칠만한 명문이 많은지 알아낼 수는 없었다. 대화체가 많은 걸로 봐서는 소설책같은데 소년의 표정은 소설책을 읽는 사람의 표정과는 얼토당토않게 초조해 보였다. 소년이 먼저 내리면서 책을 덮었는데 표지의 큰 글씨가 「고등학생이 꼭 읽어야 할 소설」로 돼 있었다. 순간 흠칫 무안해졌다. 본고사가 부활하고 새로 생겨난 논술시험과 관계가 있는 독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때문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치열한 경쟁은 입시생이 있는 가정뿐 아니라 거의 모든 가정의 가풍, 질서, 도덕을 종속시키고 뒤바꿀 만큼 그 영향이 심각한 것이었다. 입시의 폐해를 줄이기 위한 제도적인 수정은 해마다 꾸준히 있어왔으나 그중에도 논술고사는 획기적인 변화였던 것같다. 그 후 아이들이 책을 많이 읽게 됐다는 소문을 듣고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실상은 소설마저도 마침내 입시지옥을 거드는데 한 몫을 톡톡히 하게 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입시제도뿐 아니라 교육 전반에 걸친 개혁논의가 요즈음처럼 활발한 때가 없는 것같은데 사법개혁이나 의료개혁에 대한 구상을 봐도 고급인력일수록 먼저 사람이 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여지껏 등한시해왔던 교육의 기본이념으로 돌아가려는 나름대로의 고민을 읽을 수가 있다. 여북해야 명심보감을 가르치는 대학이 다 생겨나겠는가? 학생들 스스로도 그걸 환영하고 있다지만 다 알다시피 명심보감은 예전에 가정이나 서당에서 어린이들에게 사람노릇의 기본을 가르치던 한문책이다.

 고려시대에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이 책을 한문을 배우기 위한 교재로 삼는다면 모를까, 거기 나오는 지켜야 할 구체적인 덕목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보긴 어렵다. 물론 일관되게 흐르는 악을 멀리하고 선을 권장하고, 부귀나 권세보다는 사람다움의 귀함을 으뜸으로 친 정신은 현재에도 얼마든지 권장할만 하나 그건 우리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배우기 시작해서 국민학교에서는 이미 체질화됐어야 할 사람노릇의 기본덕목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지금보다도 훨씬 늦되던 예전에도 어린이들 훈육용으로 쓰던 책이다. 이제와서 대학에서 그걸 가르치는 게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라 오죽해야 대학에서 그걸 가르치지 않을 수가 없었을까 그 고충을 알 것같아서 하는 소리다.

 대학에서 사람노릇의 기본을 가르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사람노릇의 기본을 익혀야 할 시기에 그걸 안 가르쳤다는 소리이다. 뭐가 그렇게 급했던지 유치원에서는 국민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을 가르치느라, 국민학교 저학년때는 고학년 것을, 고학년때는 중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을 가르치느라 정작 그 시기에 배워둬야 할 것은 건너뛰고 만 것이 아닐까. 앞으로는 자원봉사경력을 입시에 반영하는 대학까지 나올 모양이지만 명심보감을 뒤늦게 가르치는 것처럼 어떻게든 사람을 만들어보려는 대학당국의 고충은 이해가 가나 위선자를 양산하는 결과나 되지 않을까 미리 겁이 난다.

 외국유학에서 돌아와 대학강단에 선지 얼마 안 되는 젊은 교수한테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리포트만 내라고 하면 으레 베껴서 내는게 거의 관례화되다시피한 것을 참을 수 없어 한 그는 시험을 안치고 리포트로만 학점을 줄테니 성실한 리포트를 작성해달라고 누누이 당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 놈의 컴퓨터 덕으로 각자 재주껏 활자체를 바꾸고 문서를 미려하게 꾸민 것만 달라 보일뿐 내용은 한 자의 실수도 없이 똑같은게 무려 80%이상인데 분노한 젊은 교수는 경고한대로 모조리 낙제점을 주려고 했더니 나이 지긋한 교수들이 그 애들이 어떻게 들어온 대학인데 그렇게까지 가혹하게 할 게 뭐 있느냐고 되레 타이르더라고 했다. 대학생으로서의 최소한의 책임감과 정직성이 결여된채 대학생이 된 걸 이상해 하지 않고 오직 대학생이 된 것만 대견해 하는 풍토를 개탄하는 그가 외롭고 안쓰러워 보였다.

  문제는 『어떻게 들어온 대학인데』에 있는 게 아닐까. 들어가기만 하면 과정의 온갖 부실함은 눈 감아줘 버릇해온 연장선상에 우리 사회의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안가리는 한탕주의가 판을 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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