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상속 갈등… 회사 부도위기/주변선 “소문난 효자… 안믿긴다” 박사학위를 가진 존속 살해범 김성복은 돈을 위해 거침없이 인륜을 저버린 패륜아였다.
김은 54년 서울에서 태어나 완고한 아버지 슬하에서 J중·고를 나와 72년 Y대 법학과에 입학, 76년에 졸업했다. 졸업 이듬해인 77년 E대 교육학과 출신인 윤모씨와 결혼,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부인과 함께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불교신자인 아버지와 종교문제로 갈등이 일기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방위병 복무를 마치고 부인과 함께 82년 미국유학길에 나선 김은 웨스트일리노이주립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테네시주립대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따 일리노이주립대에서 잠시 시간강사를 하다 90년 혼자 귀국했다.
유학기간중 아버지가 보내주는 생활비가 넉넉하지 못해 어머니가 몰래 돈을 부쳐주곤 했다. 김은 혼자 귀국하기 전 가족과 함께 몇차례 영구귀국을 시도했으나 딸(18)이 국내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부인과 자녀들을 데리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부인과 자녀들은 현재 미국 테네시주에 거주하고 있다.
90년 혼자 귀국한 그는 잠시 J대와 D대에서 시간강사를 하다 아버지 회사인 해강기업(주) 이사로 들어갔는데 방학때면 미국에 가 가족들과 함께 보내곤 했다. 92년 S대 경제학과에 조교수로 임용된 뒤에도 거의 매일 해강기업(주)에 출근할 정도로 사업에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경험부족을 이유로 주요 업무는 맡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94년 5월 독자적으로 마포구 서교동에 자본금 2억의 해강농수산(주)을 설립했는데 김씨가 40%의 자본금을 대고 3명의 이사가 각 20%씩 출자했다.
농수산물을 지방에서 매입, 도매로 공급하는 이 회사는 초기단계부터 자금압박을 받아왔다. 지난해 11월에는 거제도에 농수산물창고를 설치하는데 필요한 자금 9억여원을 수협에서 대출받았으나 재정상태가 악화되면서 부도가 날 지경이었으나 아버지는 전혀 지원을 해주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김은 아버지가 88년 작성한 유언장에서 거의 전재산을 학원재단에 기부하기로 한 사실에 상당히 격분했던 것으로 알려져 경찰은 재산을 둘러싼 부자간의 갈등이 범행의 주요동기가 된 것으로 보고있다.
S대 동료교수등 김의 주변인물들은 그러나 『소탈한 성격에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했고 완고한 아버지의 지시대로 밤 11시로 돼있는 귀가시간을 잘 지키는등 아버지 말에 절대 순종한 효자였으며, 형제간의 우애도 원만했다』며 그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 때문에 경찰은 수사과정에서 그의 행적에 의문점이 많고 이에 대한 그의 해명이 납득되지 않았는데도 섣불리 범인으로 다그치지 못했다. 목 동맥을 정확하게 찌르는 잔인 한 범행수법으로 보아 도저히 아들의 범행으로 볼 수 없었다고 한 수사관은 실토하고 있다.<박희정·박일근 기자>박희정·박일근>
◎범인 일문일답/“부도나면 집안에 누끼칠까 두려웠다”
―범행동기는.
『아버지 몰래 지난해 5월 설립한 「해강 농수산」이 심각한 자금압박을 받았다. 부도가 나면 아버지와 집안에 엄청난 누를 끼칠것같아 두려웠다. 그래서 부도를 막으려고 일을 저질렀다』
―현재 심경은.
『모든 분들에게 죄송하다. 할 말이 없다. 어머니에게 가장 미안하다』
―평소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했나.
『훌륭한 아버님이셨다. 모든 이에게 잘 대해주고 굉장히 자상한 분이셨다』
―대화로 문제를 원만히 해결할 수 있었을텐데. 또 다른 살해이유는.
『…』
―아버지에게서 재정지원을 받은 적이 있는가.
『없다』
―범행은 어떻게 했나.
『아버님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뒤 눈을 감고 일을 저질렀다』
―범행후 아버님 영정앞에 섰을 때의 심경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용서를 빌었다』
―어머니나 부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나.
『전혀 모른다. 사건직후 어머님은 고혈압으로 동맥이 터져 숨진 것으로 생각했다』
―유언장에 대해서 알고 있었나.
『전혀 모른다』
―박한상사건의 파문을 알고 있었나.
『알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은.
『죽고 싶다』 <박일근 기자>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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