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찬가」 등 3,000여곡 작곡… 가요사 큰 족적/패티김·김재순 전국회의장 등 지인 500여명 조문 17일 68세로 별세한 작곡가 길옥윤(본명 최치정)씨의 서울대병원 빈소에는 상오 9시께 패티 김이 달려와 딸 안리양을 부둥켜 안고 오열했으며, 넋을 잃은 부인 전연란씨에게 『그동안 너무 수고가 많았다』며 오래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어 대학 동창이자 절친한 친구인 김재순전국회의장, 주돈식문화체육부장관, 가수 최희준, 작사가 박건호등 5백여명의 지인들이 찾아와 조문했다.
길옥윤씨는 그가 슬픔과 기쁨을 섞어 빚어낸 음악 만큼이나 파란 많은 일생을 보낸 대중음악계의 큰 별이자 방랑자였다.
그가 남긴 가요 3천여곡은 치열하고 부단한 창작열 속에 살다간 음악적 장인의 모습을 평가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 「서울의 찬가」 「이별」 「사랑하는 마리아」등 이제는 국민가요 처럼 된 노래를 통해 그는 1960∼1970년대의 국민적 정서를 이끌었다.
서구의 대중음악이 무차별적으로 밀려들어올 무렵 이를 적극수용하면서 한국적 색깔을 가진 음악으로 바꾸어 놓은 그의 공은 가요사의 큰 업적으로 꼽을만 하다.
66년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패티 김과의 결혼과 7년만의 파경은 사회적으로도 큰 화제가 되었다. 패티 김과의 사이에 딸 정아를 둔 길옥윤씨는 28살 연하의 전연란씨와 79년에 재혼, 딸 안리를 얻었다.
그런 삶이 더러는 무정하게 비치기도 했지만, 애증의 파도를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떠돌았던 그의 인생관을 읽을 수도 있다.
1927년 평북 영변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고보와 경성제대 치과를 나왔다.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전공을 포기한 그는 해방직후 박춘석 노명석씨등과 그룹 「핫팟」을 만들어 연주활동을 시작했다.
49년 일본으로 밀항한 후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한 그는 62년 귀국해 패티 김을 만나면서 음악인생의 꽃을 피웠다. 패티 김과 헤어진 후 한 때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지만 혜은이라는 가수를 발굴함으로써 다시 힘을 발휘한다.
88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마샬공화국의 국가를 작곡하는등 국제적인 작곡가로 발돋움 했지만 골수암이라는 병을 얻고 말았다.
SBS는 18일 하오9시50분 그의 인생과 음악을 추모하는 다큐멘터리 「길옥윤의 빛과 그림자」를 방송한다.<권오현 기자>권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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