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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물의 국적시비/박명진(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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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물의 국적시비/박명진(한국논단)

입력
1995.03.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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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가정교사」와 「쇼군 마에다」라는 미국국적의 일본영화 수입문제로 적지 않은 물의가 일고 있다. 공륜위원장이 자리를 물러났고 일부 영화인들은 위장 일본영화 수입저지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두 영화의 수입을 놓고 강한 비판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이렇다. 일본이 배경이 되었으며, 감독과 출연배우들이 일본사람이며 실질적인 자본주도 일본인 영화들인데 제작사가 미국이라고 해서 미국 영화취급을 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 영화들이 위장된 일본영화라는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영화들을 미국영화로 판정한 공륜의 일처리가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어렵다. 공륜의 담당자들은 제작사와 배급사의 국적을 기준으로 영화의 국적을 가르는 정부당국의 기준에 의해 심의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명백한 일본풍을 모른 체 했다는 비난도 있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엄연한 법적 기준을 무시하고 느낌과 감에 의해 일본영화로 판정을 했대도 그것은 월권이라고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나라간 자본의 이동과 물적·인적 이동이 빈번한 소위 세계화의 시대에는 영상물의 국적을 판가름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5∼10여개 국가가 참여하는 합작도 빈번하여 자본은 미국, 제작사는 유럽, 배우나 감독은 일본 소속인 영상물같은 것이 앞으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영상물의 국적시비는 빈번히 일어날 수 있으니 차제에 영상물의 국적기준에 대한 새로운 검토가 필요하다. 이것은 일본영화의 「위장침투」에 대한 대책의 일환으로서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국적관련 논란은 극장영화나 비디오 쪽보다는 외국 프로그램의 쿼터제가 적용되고 있는 방송쪽에 조만간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현재 지상파방송에는 20%, 유선방송의 경우는 프로그램 종류에 따라 30∼50%를 넘지 못하게 쿼터가 책정되어 있는데 최근 이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통상마찰이 일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이 어떤 결말을 보게 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영상산업 기반이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앞서 있는 유럽국가들도 버티고 있는 처지에 우리가 쉽게 물러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쿼터가 존속하는한은 외국의 영상제작·배급사들이 그것을 우회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전략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영상물같이 창조작업이 요구되는 문화상품의 국적은 일반 공산품과 똑같이 생산지의 국적, 즉 제작사의 국적만을 따를 수는 없다. 물론 자본의 이동과 물적·인적 이동이 별로 없었던 시대에는 대체로 합당한 것이었다. 제작사와 창조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국적이 거의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작이 일반화한 오늘날에는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기준을 만들기 위해서는 유사한 문제를 몇십년 앞서서 겪었던 유럽국가들의 경우를 참고할만 하다. 60년대에 유럽국가들은 미국영화의 스크린 쿼터제도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자국의 영화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여러가지 지원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자 시장확대에 어려움을 느낀 할리우드 영화사들은 유럽 각국에 현지법인을 만들어 놓고 유럽국적의 미국산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제작사만 유럽일뿐 시나리오, 감독, 배우, 스태프진, 자금등이 대부분 미국것인 영화들이다. 이렇게 하면 쿼터의 장벽을 뚫을 수 있을뿐더러 세제혜택, 재정지원등 유럽국가들이 자기나라 영화에 대해 베풀고 있었던 지원혜택도 받을 수 있는등 꿩먹고 알먹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할 수만은 없었던 일부 유럽국가들은 이른바 위장 미국영화의 침투를 막기 위해 영화의 국적을 판정하는 기준을 바꾸어 버렸다. 영화의 국적을 제작사의 국적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창조작업에 참여한 사람의 국적을 기준으로 판정하는 방법이다. 시나리오작가, 감독, 주연, 조연배우, 오리지널 음악작곡가, 카메라맨, 편집자등 영화창조작업에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일정한 비율 이상이 동일국적일 때 그것을 그 영화의 국적으로 판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릇 모든 기준들이 그렇듯이 이런 기준 역시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국내 제작사들과 외국사간에 다양한 형태의 합작이 확대될 전망인데 초기에는 노하우의 문제 때문에 국내 제작사들의 창조작업 참여율이란 극히 낮을 수도 있다. 이때 이런 영상물을 외국산으로 분류하면 단기적으로는 선의의 국내 제작사들의 합작의지를 위축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합작의 근본취지도 궁극적으로는 우리 영상산업의 해외진출이지 단순한 자본의 증식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부작용은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기준의 국적판정을 할 것인지 결국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한 선택의 문제이다.<서울대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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