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국방부는 앞으로 동아시아지역에 10만 병력수준의 군사력을 유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냉전이 종식된 직후 92년 국방부 보고서는 동아시아 미군병력이 점차 축소될 것으로 전망한데 반해 지난 2월27일 발표한 「동아시아 전략보고서」는 미국이 안보역할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미국정부가 현 시점에 이런 보고서를 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행정부는 국내와 국외의 청중을 생각했을 것으로 본다. 국외 청중으로는 미국의 전통적 동맹국들과 우호적인 국가들, 그리고 안정을 위협하거나 위협할 수 있는 세력들이 있다. 이 가운데 전통적 동맹국들(한국, 일본, 호주)에 대해서는 냉전의 종식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방위조약의무를 충실히 수행할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경우에 앞으로 미국의 안보역할을 전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면 지역안정을 위협하는 정책조정이 불가피하게 될 수도 있으므로 일본을 안심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에 대해서는 북·미 핵합의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한국이 불안하게 느낀 나머지 핵문제 해결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행동을 취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한국을 안심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같다.
다음, 동맹국은 아니지만 미국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대부분의 동남아국가들에 대해서도 미국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해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특히 영토분쟁 등으로 중국의 위협가능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동남아국가들은 공식적으로는 다소 모호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실제로는 미국이 이 지역에 남아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안정을 위협하는 세력(북한)과 위협할 수 있는 세력(중국)이 있다. 북한에 대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미 국방부 보고서는 평화조약이나 핵문제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북한이 안정을 파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국은 「보고서」를 통해 북한의 전쟁도발을 억제하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 틀림없다. 중국에 대해서는 지역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아시아의 패권세력으로 자처해 왔으며 최근에는 군사력의 급속한 신장을 보이고 있으므로 중국의 경제성장은 지역세력균형을 위협할 수 있다. 미국방부 보고서는 바로 이런 문제의식에서 중국에 대해 지역헤게모니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경고하고 있다.
미국정부는 국외청중 못지 않게 국내청중도 의식하고 있다. 최근 미국 여론은 다분히 고립주의적인 면이 있다. 미국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사라진 마당에 왜 미국은 세계 도처에서 군사적 부담을 계속 짊어져야 하는가? 특히 미국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미국의 동맹국들은 안보 무임승차(FREE RIDE)를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92년 대통령선거에서 클린턴은 미국경제를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약속하고 당선되었는데, 지난해 11월 거의 반세기만에 상·하원의 다수를 장악한 공화당은 지금 민주당보다도 더 미국우선주의를 부르짖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의식하고 국방부는 미국의 안보역할이 지역안정에 기여할 뿐 아니라 「미국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수단」이 된다고 지적하면서 아시아의 경제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의 의도는 분명해졌다. 냉전은 종식되었지만 미국은 안보의 역할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면 우리의 입장은 어떤 것인가? 미국이 자국 이익을 위해 주한미군을 현 수준에서 계속 유지하겠다면 우리는 주한미군의 유지비 일부를 부담할 필요가 있겠는가? 오히려 미군철수를 요구하는 편이 외교적으로 유리한 것은 아닌가? 사실 우리 국방부는 거의 매년 주한미군 주둔비 분담액문제로 미국방부 실무자들과 신경전을 벌여왔고 우리 언론들은 미국의 요구가 부당하다는 식으로 보도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부터 생각해야 한다. 미국이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문제 이전에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문제부터 대답해야 한다. 북한의 전쟁도발을 억제하기 위해 주한미군의 역할이 필수적이라면 우리 국방비의 약 2%에 해당하는 주한미군 유지비의 한국정부 부담액 연간 3억달러는 큰 돈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판단이다. 북한의 위협과 상관없이 주한미군을 유지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과연 우리는 북한의 위협만 없다면 미국의 안보역할 없이도 동북아지역이 안정될 수 있으며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보장할 수 있다고 믿는가? 아니면 미국의 안보역할이 계속 필요하다고 믿는가?
미국방부 보고서가 미국 국민을 설득하려고 한다는 것은 미국국민 대다수가 그 설득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미행정부의 입장을 불변의 정책으로 믿고 대응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된다. 우리의 정책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사회과학원장>사회과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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