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상잔·산업화 혼란속/정신구원 찾아 급속팽창/다양화 불구 「기복」한계 여전/70·80년대엔 민주화운동 큰몫…「오대양」 등 사이비 물의도 해방 이후 한국종교는 비약적으로 성장해 왔다. 동족상잔의 한국전쟁과 60년대 중반 이후 가속된 산업화가 빚어낸 전통가치관의 붕괴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과 정신적 위안처를 찾게 했고 그 결과 우리 사회를 세계에 유례없는 다종교사회가 되게 했다. 비교적 신자가 되는 과정이 까다로운 천주교의 신장은 각 종교의 성장을 잘 대변한다. 해방 전해인 44년 신자수가 18만명이었던 천주교는 6·25가 끝나던 53년에 16만명으로 감소했으나 60년 45만명을 기점으로 10년마다 거의 배에 가깝게 증가했다.
문화체육부가 펴낸 94년판 주요통계현황의 종교별 교세자료를 보자(신자수의 경우 앞 숫자는 85년 센서스집계이며 괄호안과 나머지 통계는 92년 각 종교의 자체 자료).
이 자료에 의하면 불교는 36개 교단에 사암 1만6백여개·교직자 3만8백여명, 불자 8백5만(2천8백98만), 개신교는 1백13개 교단에 교회 4만2천여개·교직자 8만4천여명, 신자 6백48만(1천4백46만), 천주교는 성당 9백여개·교직자 8천5백여명, 신도 1백86만(3백5만)에 이른다. 유교는 교당 2백30여개·교직자 1만8천2백여명, 신자 48만(1천26만), 천도교는 교당 1백50여개·교직자 5천1백여명, 신자 2만6천(1백12만), 원불교는 교당 4백여개·교직자 8천3백여명, 신자 9만2천(1백19만), 대종교는 교당 90여개·교직자 2백3명, 신자 1만1천(46만) 등이다.
한국의 종교는 교세 팽창과 비례해 사회에 직·간접적이고 복합적인 영향력을 미쳐왔다. 특히 종교계의 진보세력이 중심이 된 민주화운동과 인권투쟁은 독재시대에 찬연히 빛났다. 천주교의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개신교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불교의 민중불교운동세력은 70·80년대 민주화운동과 인권투쟁의 중심축이었다. 천주교의 경우 74년 지학순 주교 구속을 계기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됐다. 사제단은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을 파헤침으로써 87년 6월항쟁의 기폭제를 마련했다.
불교계가 타성을 깨고 사회문제에 눈을 돌리게 된 돌발적 계기는 80년 전국의 사찰에 계엄군이 난입한 10·27법난이었다. 불교계는 10·27법난을 비구―대처분규를 촉발한 고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정화유시이후 정권이 교권에 개입한 치욕의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 종교계의 대표적 문제점은 기복신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 사회구원이나 자비의 실천보다 개인의 복을 비는 신앙행태는 종교가 사회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 특정 종교간의 배타적 자세도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갈등요소이다. 모든 종교마다 구원의 길이 있다는 주장과 함께 종교간의 대화와 공존의 모색에 앞장섰던 전 감신대학장 변선환 목사가 감리교단으로부터 출교 처분된 사건(91년11월), 종교연구가 탁명환씨 피살사건(94년 2월) 등은 건전하고 성숙한 다종교사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또 우후죽순처럼 사이비종교가 등장, 숱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80년대의 오대양사건과 90년대초의 종말론파문 등은 비뚤어진 신앙심리에서 비롯된 탈법·사회일탈행위로 지탄을 받은 대표적인 경우였다.
종교의 성장배경에는 탁월한 지도자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불교계의 종가격인 조계종은 만공 효봉 금오 성철스님 등이 선풍을 진작시키며 선맥의 큰 봉우리를 이루었다. 특히 93년 11월 열반한 성철스님이 불러 일으킨 깨달음과 수양에 관한 돈·점논쟁, 열반후의 추모열풍은 불교에 대한 민족적 정서를 입증했다.
개신교는 해방직후부터 신사참배 참회, 진보·보수 신학논쟁 등으로 교단분열의 길을 걸었다. 기독교장로회는 「신앙은 보수적이나 신학은 자유」라는 고 김재준 목사의 진보적 신학관을 토대로 사회참여운동을 주도했다.
개신교의 성장에는 한경직 강원룡 원로목사와 김재준 목사의 공로가 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천주교는 69년 김수환 주교가 추기경에 서품되는 영광을 안았으며 80년대 들어 천주교전래 2백주년대회와 세계성체대회 등으로 위상을 높였다.
반세기를 거치면서 양적 팽창을 거듭해 온 우리 종교계는 앞으로 무엇을 지향하며 어떤 방식으로 이 다원화한 사회와 민중을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인가. 서울대 정진홍(종교학)교수는 『종교의 세계사는 대립과 갈등 속에 되풀이돼 온 측면이 크다. 민족통일이라는 민족사의 가장 큰 과제를 남겨놓고 있는 우리 종교계가 그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며 『모든 종교가 경쟁을 지양하고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는 바탕 위에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견인차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김병찬 기자>김병찬>
◎민족종교의 부흥/80년대이후 열기 회복… 종파수 4백여개 추정
3·1운동의 주체였던 천도교,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대종교등 민족종교는 해방이후 쇠락의 길을 걸어오다 80년대이후 부흥의 전기를 맞았다. 대학가에 뿌리찾기 열기가 번지면서 민족종교는 대학생층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민족종교의 교리체계는 대부분 후천개벽(새 세상이 도래하면 한민족이 세계의 중심이 된다는 사상)과 해원상생(원한을 씻고 서로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자는 사상)을 골간으로 하고 있다.
소태산 박중빈이 창시한 원불교는 불교와 전통적인 민족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민족종교 가운데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국조 단군한배검을 교조로 신봉하는 대종교는 독립운동가 나 철이 창교했다. 강증산을 교조로 모시는 증산도는 80년대 대학가의 민족종교 열기에 불을 지피게 한 종교이다.
현재 민족종교의 종파는 4백여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체계적 교리와 실체를 갖추고 있는 종파는 90여개 정도로 정리된다. 민족종교는 대부분이 유교중심의 가치관이 붕괴되었던 조선시대 말기에 발흥, 오늘날에도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지배계층에 억눌려 살아오던 당시의 민중에게 새로운 미래를 제시했던 민족종교는 해방후 반세기동안에도 수난과 고통을 겪어야 했던 우리 민중에게 구원의 힘이 돼 주었다.<김철훈 기자>김철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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