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개월만에 무정부상태 회귀/내전이냐 평화냐 앞날 안개속 소말리아에 남아있던 유엔평화유지군이 2일 모두 철수했다. 미국과 이탈리아의 해병대 병력 1천8백여명은 1일과 2일 유엔군의 마지막 거점인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공항과 항구에서 방글라데시군 9백명과 파키스탄병력 1천5백명등 모두 2천4백명의 유엔평화유지군의 철수작전을 완료했다. 『소말리아는 소말리아인의 손에 달려있다』는 워런 크리스토퍼미국무장관의 말처럼 이제 내전이냐 평화냐도 소말리아인들의 몫으로 남게 됐다.
유엔평화유지군이 철수하자마자 모가디슈공항은 최대 군벌 모하메드 아이디드세력이 장악했고 주민들은 평화유지군이 남기고 간 물자를 약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내전과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과 유엔이 벌였던 「희망회복작전」은 27개월만에 다시 무정부상태의 원상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국제사회가 소말리아내전에 개입한 것은 92년 12월. 미국주도의 유엔안보리는 탈냉전의 신세계질서구축의 일환으로 보스니아사태와 함께 소말리아내전에 개입했다. 한해 전인 91년 22년간의 철권통치를 해온 시아드 바레대통령이 쿠데타로 축출된 후 촉발된 군벌간의 내전은 가뭄에 의한 기근과 더불어 인구 7백69만명의 소말리아를 죽음의 땅으로 몰아넣었다. 91년에만 30만명이 굶어죽고 2백만명이 영양실조에 걸렸으며 이들의 처참한 모습은 텔레비전화면을 통해 전세계의 안방에까지 충격적으로 전해졌다.
소말리아를 돕기위한 국제구호기관의 노력은 계속됐으나 구호품은 군벌들의 약탈대상이 되었다.
유엔의 다국적군 파병결정은 이같은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또 그 인도주의적 목적에 국제사회가 광범위한 지지를 보냈다. 한국의 상록수부대 2백52명이 한국 역사상 처음 평화유지군으로 소말리아에 파병된 것도 이같은 국제정세 때문이었다.
그러나 갈리사무총장이 미국에 대해 군벌무장해제를 요청하면서 사태는 파국으로 반전되었다. 군벌의 존폐위기를 느낀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세력이 93년 10월 미군을 공격, 미군18명을 살해하고 78명을 부상케했다. 더욱이 숨진 미군병사가 소말리아인들의 손에 의해 모가디슈중심가서 밧줄에 묶여 끌려다니는 충격적인 장면이 TV를 통해 생생히 전해지면서 미국내 여론이 끓었다. 『인도적 구호활동을 하는데 왜 미국군인들이 개죽음을 당해야 하느냐』는 분노가 미군정부로 하여금 94년 3월 유엔다국적군에서 손을 떼게 만들었다.
결국 유엔과 미국의 소말리아작전은 실패로 드러났다. 미국과 유엔은 28개월동안 1백명의 인명희생과 16억6천만달러의 비용을 부담했다. 자체능력으로는 국가구실을 할 수 없는 나라를 유엔을 통해 「나라같은 나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갖고 소말리아에 개입했던 클린턴정부의 정책도 실패했다.
소말리아개입 실패로 유엔의 권위는 크게 망가지고 말았다. 탈냉전이후 세계국지분쟁의 해결방도로 각광받던 유엔평화유지군에 회의를 불러 일으켰다. 미국의 군사력과 돈에 의존해온 유엔의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인 것이다. 공화당 주도의 미의회는 유엔평화유지 분담금을 삭감하려는 추세로 이어지고 있다.
소말리아개입의 실패는 스스로 국난에서 탈피하려는 의지와 능력이 없는 국가를 유엔이나 미국인들 어쩔수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김상우 기자>김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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