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년전 「그자리」 찾은 백낙규씨/유열사와 동갑내기의 이웃사촌/요즘세대 「그함성」의 뜻 아는지… 『아오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던 유관순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네』
유열사의 고향 충남 천안군 병천면 「지렝이 마을」출신인 백낙규(91·경기 평택시 비전동)할아버지는 3·1절을 하루 앞둔 28일 노구를 이끌고 아오내 장터를 찾아 76년전의 감격을 되새겼다.
농사일을 돕던 백할아버지는 이웃 처녀 유관순과 동갑으로 당시 15세였다. 유열사도 부친이 소작농이었으나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서울 이화학당에 유학하고 있었다.
유열사는 서울의 만세시위로 학교문이 닫히자 고향으로 내려왔었다. 백할아버지는 류관순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 몇차례 보았으나 고향에서의 만세 궐기를 꾀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유열사는 몰래 부친과 경성유학생 조인원 이백하 등과 안성 천안 청주 진천일대 학교와 교회 유림등을 찾아 다니며 만세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거사일은 음력 3월1일(양력 4월1일). 아오내 장터에 5일장이 서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 무심코 장터 구경을 나왔던 백소년은 상오 9시께 장터거리 위쪽 매봉산 언덕에서 3명의 처자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치는 것을 목격했다. 장터는 놀라움과 흥분으로 술렁였다.
『선두에 선 처녀는 놀랍게도 유관순이었어. 역시 동갑인 경성유학생 「금순이」와 「수애」가 뒤따랐어』
3명의 처녀들은 창호지에 그려 수숫대에 붙인 태극기를 흔들며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남색 끝동이 달린 흰 저고리에 검정색 치마차림의 유관순은 마을 사람들과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만세를 부를 것을 호소했다.
『당돌한 행동이었지. 하지만 한사람 두사람씩 만세 행렬에 가담하기 시작, 순식간에 수백명이 모였어. 나도 절로 만세 소리가 나오더군』
장터앞 신작로를 가득 메운 시위 행렬은 마을어귀 헌병 주재소를 에워싸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놀란 일본 헌병은 달아났고, 「독립만세」의 함성이 아오내 마을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낮 12시께 트럭 십여대로 들이닥친 일본 헌병대는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시작, 마을은 아수라장으로 변해 길과 논바닥이 온통 피로 물들었다.
『유관순은 아비규환속에서도 끝까지 만세를 외치고 있었어. 나중에 헌병대에 끌려가 옥중에서 참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 전체가 통곡을 했어.
요즘 젊은 사람들이 그때 그 「만세」의 뜻을 알지 모르겠어』
백할아버지는 광복 50주년인 올해의 3·1절이 더욱 감격스럽다며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병천=송영웅 기자>병천=송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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